삶의 방식인 정교성(Orthodoxy)은 신앙과 교리에 대한 경험적 접근으로 알려져 있다. 성경에 뿌리를 둔 정교의 신앙과 교리는 과거와 현재의 성인들이 삶에 대해 보여준 생생한 가르침으로 인해 풍요롭게 되었다. 또한 교회의 교부들과 교사들이 편 신학적 사색과 교리적 일탈(이단)을 다룬 여러 공의회의 결정들에 의해 풍부해졌다. 이제 정교회의 교리에 대한 서론으로서 교회의 전통과 (전통의 한 부분인) 성서를 그리스도교 신앙과 교리의 원천으로서 살펴보려 한다.
- 거룩한 전통과 정교회의 교리
정교 신앙과 교리의 원천은 ‘거룩한 전통’이라고 일컬어진다. 계시된 하느님의 말씀으로 여겨지는 성경과 (1)성경만큼 중요하거나[로마카톨릭 교회] (2)이차적이거나 심지어 무시해도 될 정도로 여기는[개신교] 교회전통 사이에 일종의 이분법을 말하는 서방 그리스도교와 달리, 정교회는 교회전통이 성경을 포함한다는 입장을 지니고 있다. 이는 성경이 ‘에피페노메논’(epiphenomenon), 곧 그리스도교 전통의 ‘외적 형태’이기 때문이다.
그럼, 이 전통이란 무엇인가? 성경을 포함하는 이 전통의 외적 형태들은 무엇인가?
교회의 거룩한 전통
교회의 전통은 다름 아닌 성령 안에 있는 삶, 곧 교회의 삶이다. 그리스도교의 관점에서 볼 때, 교회는 단지 전통과 이 사회의 역사를 동일시 할 수 있는 인간사회가 아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살아있는 몸으로서 인간 구성원들이 관계하는 정도의 역사를 지니며, 동시에 역사가의 눈을 벗어나면서 신앙의 눈으로만 볼 수 있는 내적 삶을 지닌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역사를 인도하는 내적 힘과 역사에 영감을 주는 영, 곧 하느님의 성령이신 힘과 영을 교회 안에 있는 성령의 삶이 드러내는 외적, 인간적 현상들과 구별한다.
열두 사도나 더 큰 무리의 사도들(이를테면 70인 사도들), 또는 성 바울로 같은 선교 사도들에 의해 선포된 주님의 가르침들은 사도공동체에 전해졌다. 일단 성인들에게 전해진 이 신앙은 사도시대를 이은 그리스도교 공동체 안에서 계속 삶으로 이어졌다.
‘살아있는 연속성’
초대교회의 사도공동체와 그것을 잇는 공동체 사이에는 살아있는 연속성이 있다. 같은 신앙, 가르침, 교리, 그리스도교적 삶이 계속해서 존재하며, 교회의 역사를 통해 영구히 지속된다. 이런 의미에서 교회는 계속적으로 사도적이다. 곧, 초대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살아있는 연속성 안에 있음으로써 사도적 공동체이다. 교회의 삶인 전통은 그리스도교적 기원을 지닌 바로 이 살아있는 공동체로 드러난다.
1세기말까지 그리스도의 주된 가르침들과 그분의 삶, 구원역사에 관한 사실들이 그리스도교 경전에 더해졌다. 이것들은 2세기말까지 구약 49권과 신약 27권을 담고 있는 정경(正經)이라고 하는 것의 한 부분이 되었다. 그러나 더 많은 주님의 가르침과 행적들은 이 그리스도교 성경 안에 포함되지 않았다.(요한 21:24-25) 그것들은 교회의 삶, 곧 역사를 통해 영원히 지속되는 사도적 공동체의 유산 가운데 한 부분으로 남았다.
성 대 바실리오스는 그리스도의 ‘쓰여지지 않은 말씀’이라는 유산의 중요성과 우리가 그 안에서 성경을 보아야하는 ‘전통의 빛’에 대해 말한다. 또한 성인은 이 빛이 없으면, ‘성경은 그저 문자로 축소될 뿐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교회의 전통은 단지 성경을 이해할 수 있는 상황만이 아니다. 도리어 그것은 성경에 대한 생생한 해설이고, 또한 성경의 뜻을 분명하게 하며 완성하는 것이다.
전통은 그리스도교의 기원을 지닌 생생한 연속성으로서, 변하지 않고 ‘고정된 것’이거나 ‘독창성이 없는 공식의 반복’이 아니다. 전통 안에서 변화는 가능하다. 근원에 대한 연속성, 충실성과 함께 비연속성도 있다. 전통 안에서 연속성은 창조적인 충실성과 연속성이다. 그리스도교 신앙과 교리, 삶의 본질들은 언제나 같다. 하지만 이런 신앙의 표현은 신앙이 선포되는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환경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다.
신학자들이 애용하는 차이는 전통(Tadition)과 전통들(traditions) 사이의 차이이다. 대문자 T로 시작하는 전통은 교회 안에 있는 성령의 삶이다. 교회 안에서 진리와 생명의 연속성을 만들어내고, 교회에 안정성과 지속성, 불변성을 주는 것은 바로 이 삶이다. 반면에 소문자 t로 시작되는 전통들은 전통(대문자 T)이 구체적이고 역사적으로 표명된 것이며, 이것은 변할 수도 있다. 성경에서 문자와 영을 구별하듯이, 전반적인 교회의 전통 안에서도 (어떤 일의) 전후사정과 그 표현을 구별한다.
우리는 하나인 교회의 전통을 표현하는 다양한 전통들을 구별한다. 곧, 성경적, 교부적, 교리적, 교회법적, 건축학적, 전례적 전통들은 교회의 전통 속에 계신 영이 구체적으로 표현한 것들이다. 신앙과 관련해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이른바 교의적 또는 교리적인 교회 전통이다. 그러나 하나인 교회전통을 보여주는 이 모든 측면들과 현상들은 서로 관련되어 있는 까닭에, 우리는 하나인 전통의 영을 표현하는 모든 형식들을 그리스도교 신앙, 교리의 맥락과 바로 그 의미를 형성하는 것으로 이해해야만 한다.
교회의 전통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반드시 이 전통(대문자 T)의 한 부분이 되어야만 한다. 우리 자신이 이 삶을 살 때에만 우리는 교회 안에 있는 영의 삶을 이해할 수 있다. 성경에 있는 ‘와서 보라’(요한 1:46)는 말씀은 전체적으로 그리스도교 전통에도 적용된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으니 우리는 성령의 지도를 따라서 살아가야 합니다.”(갈라디아 5:25) 만일 누군가 영에 따라 살아간다면 그는 또한 영에 따라 걸어가야만 하며, 이는 그 반대도 마찬가지로서 만일 누군가 영에 따라 살지 않는다면 그는 영에 따라 걸어간다거나 영의 권고와 일하심을 이해할 수 없다. 교회 안에 있는 성령의 삶인 전통 또한 하루하루의 삶 속에 계신 영의 임재와 역사하심을 증언하는 것이다.
- 교의적 전통의 형태들
앞서서 전통의 다양한 형태들, 특별히 신앙과 교리에 관련된 형태들에 대해서 말하였다. 그것은 곧, 성경과 교부들의 가르침, 세계공의회와 지역공의회의 가르침들, 성찬예배 그리고 교회의 건축과 이콘이다.
- a) 성경
성경(또는 경전, 신구약)은 교회의 신성한 전통 가운데서도 가장 권위있는 부분이다. 마치 현대사회의 삶을 지배하는 오늘날의 법률처럼, 성경의 법들도 공동체적 삶의 결과물이다. 그러나 일단 제정되고 나면 법들은 상위에 놓이며, 우리의 삶을 통제한다. 성경도 마찬가지이다. 하느님의 성령에 이끌린 그리스도교 공동체에 의해 일단 확립이 되고나면, 성경은 상위에 자리잡으며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삶을 다스린다. 성경은 교회의 삶에서 나온 산물이며 현상이고, 동시에 인간의 작품이다. 그러나 또한 성경은교회의 이 세상적 삶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느님의 성령이 만든 작품이기도 하다. 이것이 바로 성경의 권위에 교회가 종속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성경의 신적인 원저자와 영감에 대해서 많은 말들이 있어왔다. 성경이 성령의 작품이라는 방식에 대해서 수세기 동안 여러 가지 이론들이 언급되었다. 알렉산드리아의 필로(기원전 25-서기 50년 생존)는 성령의 영감을 이해하는 이른바 ‘기계적 이론’의 주요 주창자이다. 필로에 따르면 성경의 저자들은 하느님의 영에 의해 ‘사로잡힌’ 상태였으며, 하느님은 이들을 단지 눈먼 도구로 쓰셨다는 것이다. 이보다 더 나은 의견은 성경이 인간과 성령의 협력으로 이루어졌다는 이른바 ‘역동적 견해’이다.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어떤 협력이든지간에 하느님이 이끄시고 인간이 따라간다. 곧, 하느님께서 일하시고, 인간은 하느님께 순종하는 협력자로서 그 역사하심을 자기 안에 받아들인다. 성경도 마찬가지로 신적 영감에 의한 것이다. 성령께서 영감을 불어넣어 주시고, 거룩한 저자들은 자신의 인간적이고 불완전한 방식으로 성령의 완전한 말씀과 교리들을 표현하면서 성령의 명령을 따른다.
이런 뜻에서 성경 속 책들에 있을 수 있는 불완전성을 이해할 수 있는데, 그 이유는 성서가 완전하신 신적 저자, 곧 성령과 불완전한 인간 저자 사이에 협력으로 이루어진 결과이기 때문이다. 성서에 대한 본문비평은 완전히 정상적인 것이며 정교인도 받아들일만한 것인데, 이는 정교인들도 성경을 이런 의미로 바라보는 까닭이다. 성령과 인간의 협력으로 얻은 최종 산물인 성경을 포함하여 어떤 인간적인 것도 완전한 것은 없다.
- b) 교부들
성경, 더 정확히 말해서 신약성경에는 그리스도의 모든 가르침들이 담겨져 있지 않다. 성경을 만들어낸 교회는 거룩한 경전처럼 가장 권위있는 것이라 할지라도 자기 삶의 오직 한 현상에만 전적으로 의존하지는 않는다. 교회의 중요한 가르침과 교리들은 성령 안에 있는 삶, 곧 교회생활의 한 부분인 다른 수단과 방식을 통하여 계속 존재하면서 성도들의 새로운 세대에게 전해진다. 그리스도의 진리가 우리에게 전해지는 여러 수단과 방법들 중 하나는 거룩한 교부들의 가르침이다.
우리가 이해하는 대로 교부는 신앙과 신성한 삶에서 위대한 분들을 가리킨다. 곧, 그리스도의 진리를 가르친 위대한 교사들, 교회의 충실한 지지자들, 그리스도교 신앙과 진리의 적들(이단자들)에 맞서 싸운 이들이다. 이 교부들은 그리스도교의 원천에 대한 충실성과 연속성 속에서 언제나 신앙을 가르쳐 왔다. 한편으로 교부들은 성경과 함께 성인들의 전통 속에서 전해진 복음의 완전한 진리로써 교인들을 가르치고 그리스도의 양들을 양육하였다. 다른 한편으로 교부들은 ‘신앙의 반대자들’(디도서 1:9; 딤전 6:4-5; 딤후 4:3-5)에 저항하면서 사도들의 발자취를 따랐다. ‘이단자’(‘선택하다’ 라는 뜻의 ‘애루매’ airoumai 에서 옴)는 교회의 가르침에 반하는 자신의 가르침을 선택한 사람이거나 또는 교회의 가르침을 그 한 측면만으로 축소시킨 사람이다. 따라서 이단은 축소주의이다. 교부들은 언제나 진리의 전체성(곧, 보편성, 공번성)을 주장하였다.
시대를 통해 여러 이단들과 싸운 교부들을 사도적 교부라 하는데, 이들은 사도들을 따르면서 특별히 아리우스주의와 싸웠고(성 대 바실리오스, 성 그레고리 신학자, 성 그레고리 니사의 주교 등), 네스토리우스주의와 싸웠으며(성 끼릴로스 알렉산드리아의 대주교), 단성론과 단의론에 맞서 싸웠고(성 막시모스 고백자), 이콘파괴주의에 맞서 싸웠다.(성 테오도로스 스투디온, 성 요한 다마스커스인) 8세기말까지 이르는 교부전통에 속하는 ‘옛 교부들’에 더해서 정교회는 이른바 비잔티움 시대의 ‘새로운 교부들’ 또한 인정하며, 그 가운데는 14세기의 성 그레고리 팔라마스가 가장 탁월하다.
교회는 이 교부들과 세대를 통하여 교회의 삶 속에 있는 초대교회의 생생한 연속성 안에서 살아있는 신앙에 관한 교부들의 통찰력에 의존하고 있다.
- c) 세계공의회들
교회의 교리는 이른바 ‘에큐메니칼’(또는 보편적인) 공의회들을 통해 가장 잘 확립되었다. 제 1차 공의회(325년, 니케아)와 제 2차 공의회(381년, 콘스탄티노플)에서는 성 삼위에 대한 신앙이 확정되었다. 곧, 1차 공의회에서 하느님의 육화하신 말씀(로고스)인 그리스도의 신성이 확립되었고, 2차 공의회에서는 성령의 신성이 확립되었다.
이후 세 번의 공의회에서는 ‘참 하느님이시고 참 사람이신’ 그리스도와 관련된 이른바 ‘그리스도론적 교의’가 확립되었다. 곧, 완전한 인간성을 취하심으로써 그 인간성을 구원하고 신화시키는(다시 말해서 인성을 신성과 하나 되게 하는) 신적 인격에 관한 교리가 확립된 것이다. 이 공의회들은 네스토리우스주의에 맞섰던 3차 공의회(431년, 에페소), 에프티헤스와 단성론에 맞섰던 4차 공의회(451년, 칼케돈), 단의론에 맞섰던 6차 공의회(681년, 콘스탄티노플)이다.
어떤 의미에서 다른 두 공의회, 곧 5차 공의회(553년, 콘스탄티노플)와 7차 공의회(787년, 니케아) 또한 그리스도론적 공의회이다. 테오도르 몹수에스티아, 키루스의 테오도레, 에데사의 이바스 같은 안디옥 학파의 대표자들이 지은 작품들을 단죄한 5차 공의회는 칼케돈(4차 공의회)의 결정을 번복함이 없이 (안디옥 학파를 대변하는 것으로 여겨진) 가르침에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해석을 가하였다. 이콘의 교리를 방어한 7차 공의회는 이콘의 교리가 그리스도론적 교의(곧,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셨으므로 하느님의 인성이 그려질 수 있다는 교의)의 결과인 한 그리스도론적 공의회로 여겨질 수 있다.
- d) 신앙의 신조들
서방 그리스도교는 아래의 세 신조들을 ‘에큐메니칼’한 것으로 말한다.
- 사도신경
- 아타나시오스 신조
-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
실제로 처음과 둘째 신조는 ‘에큐메니칼’(보편적인)하지 않다. 사도신경은 사실상 로마교회의 신조로서, 공동의 사도적 신앙을 반영하고 있다. 아타나시오스 신조 또한 서방교회의 신조이며, 5세기말 또는 6세기초 무렵에 (아마도 프랑스 남쪽의) 서방에서 만들어졌고, 당시까지 진행된 삼위일체 교의와 그리스도론적 교의를 반영하고 있다.
오직 참된 ‘에큐메니칼 신조’는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또는 그저 단순히 ‘신조’, the Creed )이다. 이 ‘신조’는 처음 니케아 공의회(325년)에서 공포되었다. 그리고 콘스탄티노플 공의회(381년)에서 수정되어 완성되었다. 그 이후로 ‘신조’는 모든 중요한 교회 교리의 요약으로서 널리 받아들여졌으며, 예비교인의 교리교육과 교회의 예배 등에서 모두 쓰이고 있다.
- e) 후기 공의회들
정교회는 자신을 그리스도의 교회라고 생각한다. 이런 점에서 1054년 동서 교회가 분열된 이후 열린 주요 보편 공의회들은 여전히 ‘에큐메니칼 공의회’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른바 ‘에큐메니칼 문제’를 존중하고 사목적 신중함과 전략의 차원에서 교회는 비잔티움 제국의 ‘분열되지 않은 교회’를 대표하지 않는 공의회들에 ‘에큐메니칼’이라는 이름을 붙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서 그리스도교의 분리 이후에 중요한 공의회들이 동방에서 개최되었으며, 이 공의회들은 신앙을 확립하고 그 내용을 분명히 밝힌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1341년과 1351년의 공의회들이 매우 중요한데, 여기서는 성 그레고리 팔라마스의 가르침에 따라 신적인 은총, 신적인 에너지와 ‘창조되지 않은 빛’에 관한 정교의 교리가 확립되었다.
동방지역에 대한 개신교의 침투에 대응하고, 개신교의 가르침에 관한 정교의 교리를 세우기 위해 17세기에 열린 공의회들, 이를테면 야시(Jassi) 공의회(1662년)와 예루살렘 공의회(1672년)들 또한 상대적으로 중요한 공의회로 여겨진다. 다른 중요한 문서들과 함께 이들 공의회에서 나오거나 비준된 문서들, 곧 정교 고위성직자들과 교사들(성 포티오스, 미카엘 케룰라리오스, 에페소의 마르코, 콘스탄티노플의 겐나디오스, 콘스탄티노플의 예레미야 2세, 메트로파네스 크리토풀로스, 베드로 모길라 등)에 의해 만들어진 ‘신앙고백문’ 같은 것들은 정교회의 ‘상징적 책’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이 문서들은 확실히 정교회 안에서 (과거에) ‘언젠가 성도들에게 전해져’ 영원히 지속되고 있는 정교 신앙의 증인들이다. 그러나 이 문서들의 권위는 세계공의회들과 고대 교부들의 권위에 종속된다.
- f) 성찬예배
정교회는 풍부한 예전 전통으로 유명하다. 정교의 전례는 시와 성경적 근거들, 그리고 교의적 정확성으로 특징지어진다.
정교의 전례서를 열어보는 사람은 누구라도 그것이 성경에서 인용한 구절들과 성경말씀을 생각나게 하는 것들로 가득 차 있음을 쉽게 깨닫게 된다. 정교 예배를 ‘성경적 예배’라고 부르기가 어려운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 그것은 정교 전례를 통틀어서 신구약 성경에서 직간접적으로 인용한 구절들이 아주 풍부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리스도의 부활이 그 중심에 있는 신앙의 신비들을 경축하는 정교 전례는 공의회들과 교부들의 가르침에서 온 교의적이고 교리적인 진술들로 가득 차 있다. 정교 예배의 셋째 특징은 시문(詩文)들인데, 어느 면에서는 앞의 것(곧, 교의적 정확성)과 조화를 이루지 못할 수도 있다. 기본적으로 ‘렉스 오란디 렉스 크레덴디’(Lex orandi, lex credendi, ‘기도의 법은 신앙의 법’이라는 뜻)라는 말은 언제나 참되다. 그러나 때때로 시는 여전히 ‘시문’(이는 간혹 ‘시적 자유’ 또는 부정확함을 뜻한다.)으로서 남아 있기 위해 그것 자체의 자격을 지니고 있다. 정교 예배의 이런 특징은 전혀 신앙에 해로운 것이 아니다. 도리어 반대로 또 다른 차원을 더함으로써, 또는 더 나은 표현을 쓴다면 신앙의 ‘마음’이라는 차원을 강화함으로써 신앙을 강화하고 생동감 있게 한다.
성찬예배 자체, 거룩한 신비의 성사들의 본문과 그 성사들을 거행하는 것, 그리고 교회의 일반적인 전례예식서들은 정확한 신학과 신학적 명상의 광산이며, 이것들은 믿음을 따라 기도하고 예배함으로써 신앙을 알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라도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 g) 교회법
정교회의 풍부한 교회법 또한 교회 교리에 관한 정보의 보고이다. 교회법은 신앙 – 과 신앙에 근거한 기독교의 도덕적 원칙들 -을 구체적이고 지역적이며 역사적인 상황들에 적용한다.
교회법은 동시대적 요구들에 따라 언제나 그 가르침을 다시 표현하고 그 전략을 다시 조정하고자 하는 교회의 의도를 잘 보여주는 본보기이다. 이외에도 많은 교회법들, 특히 이른바 ‘교의적인’ 것들은 교회의 가르침을 분명하면서 논쟁의 여지가 없는 방식, 곧 교회법을 제정한 세계공의회들에 의해 공포된 신앙에 관한 신조들과 같은 방식으로 표현한다. 이 교회법들은 교회의 신앙에 대한 매우 중요한 증언들이며, 따라서 신앙의 중요한 표현으로서 쓰여져야만 한다.
- h) 그리스도교 예술: 성화, 건축
끝으로 교회의 교리적 전통이 표현되는 형태중 하나는 교회 건축과 성화이다. 비잔틴 교회 전통은 교회의 건축과 관련하여 중요한 상징주의를 발전시켜왔다. ‘나르텍스’(narthex, 성당 입구 앞의 넓은 홀을 가리킴)는 하늘나라로 들어가기 위한 준비이다. 그 위에 둥근 돔(dome)이 있는 ‘트랜셉트’(transept, 십자형 교회의 남쪽과 북쪽을 향한 날개 부분)는 하늘나라 자체를 표현한다. 한 가운데 제단이 있는 성소 또는 ‘지성소’는 하느님이 거하시는 거룩한 곳과 하느님의 옥좌를 나타낸다. 이런 상징주의는 특별히 성찬예배를 드리는 동안에 생생한데, 이 때 ‘하느님의 나라가 뚫고 들어와’ 회중들 한 가운데 현존하게 된다.
비잔틴 성화는 또한 신앙을 표현하는 한 수단이다. ‘문맹자들의 책’인 성화는 성화를 ‘읽을 줄 아는’ 이들에게 신앙에 관한 것 대부분을 가르쳐준다. 성화작가가 기도와 금식을 하고 난 뒤 엄격한 전통에 따라 절제된 양식으로 그린 성화는 ‘하늘나라로 향한 창문’이 되어 신도들에게 하늘의 신비와 신앙의 신비를 드러내 보여준다. 성화는 거기에 그려진 인물과 실재가 참으로, 그리고 신비의 성사로서 현존하게 되며, 이로써 신도들을 그 인물, 실재와 친교하도록 이끌어준다. 교회의 교의적이고 교리적인 전통에 대한 해설자들과 이런 표현들을 통해 얻게 된 증언의 토대 위에서, 결과적으로 우리는 신앙의 주요 가르침들을 정교회의 삶이라는 맥락 안에서 살아왔고 경험한 것으로서 표현할 수 있다.
III. 교회의 교리 – 정교의 교의와 신앙
정교회의 믿음과 교리, 교의는 성경의 가르침과 직접적인 연속성 속에 있으며, 성경이 권위있는 해설자이기도 한 교회의 중단되지 않은 전통과도 역시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정교회는 그 어떤 ‘개혁’도 없는 ‘역사적인’ 교회로서 그 역사 속에서 합당한 자리를 차지하며, 도리어 성경에 보존되어 있는 그리스도교의 기본적 말씀에 절대적으로 충실한 교회이다.
교회의 모든 교의는 ‘성경적’이다. 곧, 성경에 기초를 두고 있다. 교회의 교의는 다름아니라 교육적이거나 변증적인 목적 모두를 위해 계시된 가르침을 권위있게 표현한 것이다. 이단은 교회가 매우 분명하고 모호하지 않은 방식으로 교리를 확립하여 진술한 이유들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나 이단에 반대하며 공의회에서 결정된 교의들만이 교회에 의해 공포되고 가르쳐진 유일한 것은 아니다. 교회의 교리적 체계는 (공의회에서 결정된) 이 교의들과 함께 교회가 세상을 향해 선포하는 구원의 말씀 가운데 한 부분으로서 언제나 가르친 다른 모든 교리들을 포함한다.
성삼위이신 하느님, 천사들과 인간 창조의 교리, 인간의 타락, 구원의 신적 계획,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 교회, 성모 마리아, 성인들, 신비의 성사들, 정교 종말론 등은 매우 개략적인 방식으로 이 곳에서 설명할 주요 교리들 가운데 속하게 된다.
- a) 성삼위 하느님
정교회의 영적 교부들이 평가한 것에 따른다면 하느님을 아는 것은 또 다른 종류의 지식이 아니다. 도리어 그것은 삶과 죽음의 문제이다. 왜냐하면 거룩한 삼위 하느님과 지옥 사이에는 제 3의 선택이 없기 때문이다.
또한 하느님을 아는 것은 또 하나의 지적 훈련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전 실존을 바쳐 얻는 지식이며, 실존적이고 경험적이며 부정의 방식(apophatic)으로 영광을 드리며 얻는 지식이다. 하느님의 현존을 우리를 채우면서 능가하는 것으로 경험할 때, 그리고 ‘마치 어린 아기가 엄마 품에 안겨있다고 느낄 때처럼’(성 대 바실리오스) 완전히 그분에게 의지하고 있다고 느낄 때 우리는 하느님을 알게 된다. 우리는 단지 개념이나 사상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 모든 것을 넘어서거나 초월해서 하느님을 안다. 왜냐하면 우리의 전 실존은 그분과 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마치 ‘가축이 자신의 여물통을 잘 아는 것처럼’ 우리가 하느님과 친밀할 때 우리는 하느님을 안다. ‘하느님을 들이마시고 내뱉을 때’,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또는 어디를 가든지 그분이 계심을 느낄 때 우리는 그분을 안다. 계속해서 그분을 의지할 때, 우리의 삶이 그분께 속해 있으며 그분의 거룩한 이름을 끊임없이 찬양하는 것이 될 때 우리는 하느님을 안다.
우리는 하느님을 ‘초월하시는’ 분, 곧 저 멀리 떨어져 계신 분으로서 안다. 하느님에 대한 참으로 믿을만한 경험과 느낌 가운데 하나는 경외심이며, 그분의 두렵고 접근할 수없는 임재 안에서 자신이 괴멸되는 느낌이다. 그러나 이와 반대되는 느낌 또한 참되고 확실한 종교경험이라는 것도 사실이다. 곧, 하느님을 내재하는 분, 친밀하게 가까이 계신 분으로 느끼는 것도 참이다.
하느님의 내재성과 초월성에 대해 정교회 전통에 따른 신학적 설명은 단순하다. 곧, 하느님은 ‘우리에게 내려오는’ 당신의 ‘에너지’(작용, 활동)를 통해 임재하시며, 반면에 그 본질만은 완전히 초월적이고, 멀리 떨어져 계시며 우리가 접근할 수 없다.(성 대 바실리오스, 성 그레고리 팔라마스)
따라서 그리스도교의 하느님은 ‘철학자들의 신’이 아니다. 그분은 다른 존재들과 닮은 ‘최고의 존재’가 아니며, 많은 본질들 가운데 있는 또 하나의 ‘본질’이 아니다. 그리스도교의 하느님은, 그분이 창조된 실재와 전적으로 다르다는 의미 안에서만 ‘최고의 본질’이시고 ‘최고의 실재’이시다. ‘만일 다른 모든 것이 존재라면 하느님은 존재가 아니다’라고 그레고리 팔라마스 성인은 말했다.
그리스도교의 하느님은 ‘세속도시’(하비 콕스)의 신학에서 말하는 ‘하늘로 유배된 신’이 아니다. 도리어 그리스도교의 하느님은 우리들과 이 세상에 대해 아주 깊이 관계하시는데, 그것은 우리가 그분의 창조물이면서 계속해서 그분께 의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의 하느님은 또한 인격적인 하느님으로서 인격들의 삼위일체이시고, 하나인 신성에서 비롯된 한 본질과 여러 에너지들을 공유하는 성 삼위의 친교이시다.
근원으로서 존재하는 신성은 성부의 위격(휘포스타시스)이시다. 성부로부터 태어나신 신성은 독생자이신 하느님의 아들, 곧 하느님의 말씀(로고스)인 위격이시다. 유일한 성부로부터 발현되는 신성은 하느님의 성령인 위격이시다.
성삼위의 세 위격(휘포스타시스) 한 분 한 분은 신성 전체이다. 이런 토대 위에서 세 신적 인격은 상호 내재(페리호레시스)와 공동의 내재적 속성 안에 거한다. 성삼위의 각 인격은 다른 두 인격과 함께 활동하지만 동시에 각 인격은 피조물과 각자의 인격적인 방식으로 관계한다. 곧, 성부는 창조의 계획(과 그리스도 안에서 창조세계의 회복)을 고안하신다. 하느님의 아들은 성부의 창조 계획(과 창조세계의 구원)이 실현되게 하신다. 성령은 (성부) 하느님의 창조 계획(과 육화하신 하느님의 말씀인 그리스도 안에서 창조 세계의 회복)을 완성하신다.
- b) 창조
신앙의 신조는 ‘전능하신 성부 하느님’을 ‘하늘과 땅과 유형무형한 모든 만물의 창조주’라고 말한다. 무엇보다도 성 이리네오스에 따르면, 성부 하느님은 ‘당신의 두 손, 곧 성자와 성령’을 써서 창조하신다. 성 대 바실리오스는 더 구체적인데, 그에 따르면 성부 하느님은 창조의 ‘태고적 원인’이시다. 하느님의 아들은 ‘창조하는 원인’이시고,(요한 1:3을 보라. “모든 것은 말씀을 통하여 생겨났고 이 말씀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성령은 창조를 ‘완성하는 원인’이시다.
창조는 그리스도교적 개념이다. 이것은 직접적인 계시(창세기)에서 온다. 어떤 철학자도 창조의 개념을 ‘무(無)에서 존재하도록 부르심’이라는 뜻으로 밝혀내지 못하였다. 시간과 공간 또한 하느님께서 창조하셨는데, 그것은 시공간이 창조와 관련된 범주로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하느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목표와 목적은 창조세계가 하느님의 복되심(행복) 속에 참여하는 것이다. 다마스커스의 성 요한은 ‘하느님의 영광과 인간의 신화(테오시스)’에 대해 말한다. 그러나 하느님의 영광이 곧 인간의 신화이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당신 자신과 당신의 행복, 영광을 당신이 창조하신 피조물, 곧 모든 창조세계 그리고 그 안에서도 특별히 인간과 소통하시려고(나누시려고) 창조하시기 때문이다.
창조는 그리스도교 안에서만 가능한데, 그것은 오직 그리스도교만이 하느님의 본질과 에너지 사이의 차이를 만들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당신의 본질과 소통하지 않은 채, 당신의 에너지를 통하여 창조하신다.
1) 세상의 창조
하느님은 하늘과 땅의 창조주이시다. 하느님은 선하신 뜻으로 세상을 창조하신다. 그분은 당신의 창조물에 관심을 가지시고 관계하신다. 하느님이 관계하지 않기를 바라는 철학적 체계(이신론, 세속주의)와 달리 그리스도교의 하느님은 돌보고 사랑하시는 하느님, 곧 하늘에 계신 아버지이시다. 그분은 창조하시고, 사물이 존재하게 하시며, 또한 필요한 것을 공급하신다. 창조물이 당신을 거역해서 돌아서거나 거부할지라도, 곧 성부 하느님의 자기 비움(케노시스)이라는 신비 안에서 하느님은 계속 피조물을 사랑하시고 돌보신다.
인간의 예는 창조주의 태도를 확증해준다. 인간의 반역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은 계속 그를 사랑하시며, 다시 당신에게로 곧 ‘죽음에서 생명에로’ 되돌아오게 할 방법을 찾으신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생명이시므로 이 생명이 없는 것은 곧 죽음이기 때문이다.
세상에 있는 악은 오로지 인간이 고안해낸 것으로만 이해될 수 있다. 세상은 인간의 악에 의해 영향받는다. 세상 또한 구속될 수 있고, 인간의 구원과 영광에 참여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 교부들이 고백자 막시모스 성인의 신학에 기초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구원의 ‘우주적 측면들’이라고 말한 것이다.
2) 천사들
하느님은 단지 하늘과 땅만이 아니라 또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의 창조주이시다. 그리스도 교회는 (사람과 같은) 인격적인 존재처럼 영적 존재의 실존을 믿는다. 왜냐하면 영적 존재 또한 ‘사람처럼’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되었으며, 세상의 창조 이전부터 존재하였기 때문이다. 영적 존재는 무성(無性)이며, 그 숫자는 엄청나지만 무한한 것은 아니다. 그들은 “구원의 유산을 받을 사람들을 섬기라고 파견된” 전례적으로 봉사하는 영적 존재들이다.(히브리 1:14)
구약에서 천사들을 가리키는 이름의 뜻은 하느님의 전달자, 일꾼, 종, 하인이다. 신약에서는 ‘천사’라는 단어와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성경을 통해 우리가 아는 천사의 세 이름은 가브리엘(하느님의 사람), 미하엘(누가 하느님과 같은가?), 라파엘(하느님이 치유하신다.)이다.
천사들의 주된 목적은 하느님의 창조세계 안에서 그분의 종이 되는 것, 그리고 특별히 사람을 돕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각 사람은 하느님으로부터 특별한 수호천사를 갖게 된다.(마태오 18:10을 보라) 천사들을 창조한 궁극적 목적은 하느님의 거룩한 이름을 영화롭게 하고 찬양하게 하는 것이다.
이제 ‘타락한 천사들’인 루시퍼와 그 무리들에 대해서도 말해야만 할 것이다. 하느님에 의해 선하게 창조된 천사들 가운데 일부가 교만 때문에 ‘하느님 없는 신들’이 되고자 하느님을 거역하여 반역을 저질렀다는 것이 교회의 가르침이다. 이 반역의 결과로 그들은 하느님의 선하신 은총과 생명에서 떨어져 나가게 되었다. 이 무리들은 사람과 이 세상을 신화(神化)시키려는 하느님의 계획에 대항하면서 하느님으로부터 떨어져 나가 거짓된 삶을 살고 있다.
3) 인간의 창조
하느님이 창조하신 유형의 것 가운데 최고인 것은 사람이다. 창세기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창조이야기를 읽는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글자 그대로 해석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것이 전하고자 하는 바는 크고 분명하다. 곧, 하느님은 존재하는 모든 것의 창조주이시고, 하느님의 창조에는 질서와 낮은 형태에서 더 높은 형태의 생명으로 나아가는 발전(더구나 ‘진화’라고 할 수도 있는.)이 있다는 것, 그리고 하느님은 모든 것을 선하게 창조하셨고, 하느님의 형상과 닮은 모습으로 창조된 인간은 창조세계에 대한 하느님의 대리인이 되도록 부름받은 매우 특별한 위치에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정신과 육체가 하나인 존재로 창조되었다. 하느님은 인간의 창조에 대한 특별한 관심을 보여주시려고 ‘당신의 두 손을 써서’ 인간을 창조하셨다. 하느님은 땅의 흙을 취하시고, 인간을 만드셔서, 그의 코에 ‘생명의 숨’ 곧, 영적 본성을 지닌 사람의 영혼을 불어넣으셨다. 인간은 하느님의 영적 창조물(천사)들과 물질적인 창조물(땅) 모두에 참여하는 까닭에 둘 사이의 연결고리가 된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사명은 창조물이 하느님과 친교를 나누게 하는 것이 될 것이라는 이유이다.(성 막시모스 고백자)
인간은 하느님처럼 되라는 특별한 부름을 받고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되었다. 교부들은 창세기의 이 가르침을 자세히 설명한다. 하느님의 모습을 지닌 인간 존재는 인간이 한 인격으로서 (성부) 하느님을 비추어주는 영적 영혼을 가지고 있음을 뜻한다. 인간은 하느님을 알 수 있으며 또 하느님과 친교를 나눌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인간은 하느님께 속하는데, 그것은 하느님의 자녀이며 그 분의 형상을 지닌 존재라는 것이 인간으로 하여금 하느님의 친척(동족)이 되게 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영혼은 하느님의 에너지와 생명을 받았다. 그리고 이 에너지 가운데 하나가 사랑이다.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사랑은 또한 하느님을 향하면서 하느님과 일치를 이루게 하고 친교를 나누게 한다.
마찬가지로 교부들은 사람 안에 있는 하느님의 형상(모습)과 하느님을 닮은 것을 구별한다. 곧, (하느님의) 형상은 인간에게 주어진 잠재성이며 이것을 통해서 인간은 신화(하느님과 친교하는 것)의 생명을 얻을 수 있다. 하느님을 닮은 것은 이 잠재성이 실현된 것이다. 그것은 누군가 이미 실현된 존재로 점점 더 되어가는 것이며, 점점 더 하느님의 형상으로, 점점 더 하느님과 같은 모습으로 되어가는 것이다. 형상과 닮음 사이의 차이는 다른 말로 하면 존재와 되어감(생성) 사이의 차이이다.
인간이 하느님의 형상을 지닌 존재이고 동시에 하느님을 닮아가도록 부름받았다는 것은 인간이 자기 안에 있는 하느님의 형상을 통해서 하느님과 계속 친교를 이루는 한 하느님의 불멸성이 그의 안에 반영된다는 것이며, 인간에게는 하느님의 창조세계가 맡겨져서 그로 하여금 이 세계 안에서 하느님의 대리인이 되라는 것과 이 세계를 돌보아 창조세계가 창조주와 친교를 이룰 수 있도록 하라는 것을 뜻한다.
고백자 막시모스 성인은 이 고귀한 사명을 사람(첫 사람 아담)에게 부여한다. 인간은 하느님의 창조세계를 그분에게 다시 되돌려 드리기 전에 그 안에 있는 모든 종류의 차이점(구별, 차별)을 극복해야만 한다. 사람은 남자와 여자, 인간이 사는 땅과 낙원, 하늘과 땅, 보이는 창조세계와 보이지 않는 창조세계 사이의 차이와 마지막으로 창조된 것과 창조되지 않은 것 사이의 구분을 극복하여 창조세계와 창조주가 하나가 되게 할 소명을 받았다. 인간이 이 연합(테오시스, 신화)을 이루는 데 실패하였기에 ‘새로운 아담’ 곧, 그리스도가 첫 사람(아담)이 받았던 본래의 소명을 이루시기 위해 대신 그 책무를 짊어지셨다.
4) 인간의 타락과 그 결과
첫 사람에게 여러 가지 지나친 완전성과 예를 들면 하느님, 창조세계에 대한 완전한 지식을 부여함으로써 (인간의) 타락이 불가능한 것으로 만드는 성 어거스틴의 ‘원래의 정의’ 교리와 달리 실현될 잠재성으로서 인간 안에 있는 하느님의 형상에 대한 그리스 교부들의 가르침 또한 퇴보(악화)의 가능성을 열어놓는다. 성 이리네오스는 첫 사람(아담)을 유아(네피오스 nepios)라고 말하면서 그는 성인이 되기 위해 성장해야만 했다고 한다. 하지만 인간은 하느님께서 그에게 제시한 성숙이라는 ‘시험을 통과하지 못함’으로써 스스로 실패하였다.
하느님이 금지하셨지만 인간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었다.(창세기 3장) ‘본래 선한’ 존재인 인간은 마찬가지로 ‘선택에 의해 선한’ 존재가 되어야만 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렇게 되지 못했다. ‘뱀’(곧, 악마)의 꼬임을 좇아 인간도 타락한 천사들이 저지른 것과 같은 일 곧, ‘하느님 없이 신이 되려는’ 일을 저질렀다. 인간의 불완전성과 결백함, 또는 더 낫게 말한다면 순진함과 ‘고발하는 자’(악마)에 의해 길러진 상대적인 우월감이 하느님께 대한 불순종과 거역을 통해 하느님과 나누는 친교에서 멀어지는 인간 타락의 원인이 되었다. 인간은 자신의 목적을 하느님 대신에 자기 자신에게 두게 되었다. 인간의 자유의지는 그의 쇠락에 책임이 있다.
서방에서는 ‘원죄’라 하고 동방에서는‘조상의(프로파토리콘 propatorikon) 죄’라고 하는 (하느님에 대한) 이런 반역의 결과는 인간이 자신의 원래 결백함을 잃어버린 것이다. 그에 안에 있던 하느님의 형상은 손상되었고, 심지어는 왜곡되었다. 인간의 이성은 흐려졌으며, 그의 의지는 약해졌고, 육체의 욕망과 격정은 거칠며 제멋대로인 것이 되었다. 인간은 생명의 조물주이고 근원인 하느님으로부터 분리되는 고통을 겪게 되었다. 인간은 자신을 죽음에 가까운 거짓 실존 속으로 밀어 넣었다. 교부들은 육체적 죽음의 원인이고, ‘종말론적인’ 영원한 죽음에 이르게 되는 ‘영적 죽음’에 대해 말한다. 왜냐하면 ‘죄의 대가는 죽음’이기 때문이다.(로마 6:23)
이처럼 죽음에 가까운 거짓된 삶, 타락의 상태, 곧 ‘영적 죽음’의 상태는 인간의 모든 자손들에게 계속 전해지며, 그리스도인 부모에게서 태어난 이들에게조차 똑같이 전해진다. 첫 사람(아담)의 개인적인 죄는 전적으로 그에게 속한다. 그러나 그가 저지른 죄의 결과는 모든 인류에게 전달된다. 어떤 것의 방향을 바꾸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인격적 자유의지가 개입된 개인적 헌신이 요구된다. 이런 인격적 헌신을 요구하는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셔서 일하심으로써 이런 변화를 가능하게 하였다.
5) 하느님의 어머니, 마리아
하느님의 어머니이신 동정녀 마리아는 ‘조상의 죄’에 참여하는가? 이 질문은 정교인에게 그리 적절한 것이 아닌데, 그것은 첫 사람(아담)에게서 나온 모든 인류 가운데 한 존재인 성모 마리아가 첫 사람의 죄로 말미암아 생겨난 ‘영적 죽음’과 타락한 상태에 자동적으로 참여하게 된다는 것이 명백하기 때문이다.
교부들은 루가복음 1장 35절을 곰곰이 생각하고는 성모님이 ‘하느님의 합당한 어머니’가 되기 위해서, 예수님을 낳을 것이라는 소식을 들은 날 성령에 의해 깨끗하게 되었다고 결론지었다.
마리아 또한 그녀의 아들에 의해 구원받았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마찬가지로 그녀의 구세주이기 때문이다.(루가 1:47) 1854년에 로마카톨릭 교회가 이른바 ‘원죄없는 수태’의 교리를 발표한 것은 불행한 일이다. 이 교리는 마리아에 관한 전통적 교회의 교리와 모순된다.
- 하느님의 구원계획
인간은 하느님을 거역하는 행위를 통해 자신과 하느님 모두에 대해 실패하였다. 그러나 하느님은 인간을 그냥 버려두지 않으셨다. 하느님은 당신의 사랑어린 돌보심과 섭리로써 인간을 살피셨다. 하느님은 당신과 같고 우리 인간이 그분을 통해 창조된 영원한 말씀(로고스) 안에서 인간의 구원을 준비하셨고, 이로써 타락 이후에도 우리는 불멸(성)(으)로 되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성 대 아타나시오스)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하느님의 계획은 ‘신성한 경륜’, 곧 신성한 베풂의 계획이라 불리운다. 성부 하느님이 계획을 고안하시고, 성자가 실행하며, 성령이 완성하여 최종적이고 완벽한 상태로 이끈다.
성부 하느님은 세상의 구원을 위해 외아들을 보내심으로써 인간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신다.(요한 3:16) 인류를 위한 구원계획을 받아들임으로써 하느님께 응답할 수 있었던 동정녀 마리아에게 이르기까지 구약을 통한 일련의 정화과정이 지나고 때가 찼을 때, 하느님은 “당신의 아들을 보내시어 여자의 몸에서 나게 하시고 율법의 지배를 받게 하시어 율법의 지배를 받고 사는 사람을 구원해 내시고 또 우리에게 당신의 자녀가 되는 자격을 얻게 하셨”(갈라디아 4:4-5)다.
- a) 그리스도의 육화하심과 구원의 신비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존재와 우리를 위해 행하신 당신의 일을 통해서 인류를 구원하셨다. 이리네오스 성인(2세기, 리용)을 시작으로 그리스 교부들은 성 대 아타나시오스가 말한 바, 곧 육화하신 하느님의 아들이 ‘우리(인간)와 같은 존재가 되셨으며, 이로써 우리가 신화되게 되었다’는 말을 계속해서 반복하여 말하고 있다. 우리의 인간적 본성을 취하심으로써 육화하신 말씀(로고스)이며 신적인 인격이신 분이 이 인성을 신적인 경지에까지 끌어올리셨다. 그리스도께서 이 지상의 삶을 통해 행한 모든 것은 (그분이) 성모 마리아의 자궁 안에 잉태되던 순간부터 인류가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이미 구원되고 신화되었다는 전제 위에 기초를 두고 있었다.
- b) 신인(神人)이신 예수 그리스도
잉태된 순간부터 하느님의 거룩한 영에 의해 기름부음을 받은 그리스도의 인성은 그 존재의 시작부터 메시아(기름부음을 받은 자)의 인성이다.
그리스도는 동정녀의 아들인 동시에 그분 자신의 본성에 따라 하느님의 친아들이시다. 그분의 인성은 몸과 영혼을 지닌 진짜 인성으로서, 배고픔과 목마름, 굴욕과 십자가 고통을 겪으셨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인성은 실재가 아니었다고 주장하는 가현설 신봉자들, 예수 안에는 영혼이 없었다고 주장하는 아리오스, 예수 안에는 이성이 없었다고 말하는 아폴리나리오스(라오디케아) 같은 이단자들을 단죄하였다.
교회는 또한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정한 에비온파(Ebionites), 성자를 성부보다 하위에 둔 단일신론(Monarchianism) 추종자들, 그리고 하느님의 말씀(로고스)이신 분의 신성을 부정한 아리우스주의 같은 이단들에 맞서서 예수의 신성을 옹호하였다. 이 모든 이단자들과 달리 교회는 신적 인격이신 그리스도는 ‘참 하느님으로부터 나오신 참 하느님’이라는 교리를 지지하였는데, 그것은 그분이 은유적으로가 아니라 자연적인 의미에서 하느님의 외아들이시기 때문이다. 그분은 하느님의 창조와 관련해서 전지(全知)하고 선재(先在)하는 신적 특성을 지니신다. 그분은 죄를 짓지 않은 유일한 분이시다. 그분은 당신의 신성을 통하여 기적을 행하시고, 신성에 합당한 신적 영광과 예배를 받으시며, 당신에 대한 신앙을 수용하신다.
인성과 신성은 위격적으로(hypostatically) 함께 결합된다. 두 가지 본성이 육신이 되신 말씀(로고스)의 한 인격, 곧 신적 인격(hypostasis) 안에 존재한다. 그리스도는 두 본성을 지닌 존재가 아니라 ‘두 본성 안에’ 존재한다. 두 본성은 ‘혼동됨이 없이, 변화됨이 없이, 나누이거나 분리됨이 없이’(칼케돈 공의회) 함께 결합된 채 존재한다. 여기서 첫 두 개의 부사(‘혼동됨이 없이, 변화됨이 없이’)는 (그리스도의) 두 본성을 혼동한 유티케스(380-456)와 단성론 이단자들에 반대하여 말하는 것이며, 뒤의 두 부사(‘나누이거나 분리됨이 없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성과 인성을 분리시킨 네스토리우스주의자들에 반하여 진술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리스도는 또한 하나는 인간적이고 하나는 신적인 두 가지 의지와 두 개의 작용을 지니며, 이 둘은 ‘인간의 구원을 이루기 위해’ 함께 역사한다. 그러나 인간적 의지와 작용은 언제나 신적인 것에 종속된다.(단일의지론에 반대하여 열린 콘스탄티노플의 제 6차 세계공의회)
그리스도 안에 있는 두 본성의 위격적인 연합의 결과는 인성과 신성의 합일(coinherence)이며, 그리스도의 인성에 주어진 자연적인 아들의 권리, 그리스도의 두 본성에 대한 하나의 예배, 그리스도의 인간적 본성의 신화, 그리스도의 이중적 지식과 힘(그러나 한 인격에게 주어진), 그리스도의 절대적 무죄함과 하느님의 어머니이신 성모가 참으로 ‘테오토코스’가 되시는 것과 하느님의 독생자를 낳기 전에도, 낳는 도중에도, 낳은 뒤에도 동정녀이심 같은 것들이다.
- c) 예언자, 사제, 왕이신 예수
예수에게는 그가 오신 목적(신화)을 이루기 위해 극복해야만 하는 여러 장애물들이 있었다. 곧, 본성의 장애, 죄의 장애, 죽음의 장애, 그리고 악마의 지배 등이다. 본성의 장애는 그의 육화하심으로 극복되었다. 죄와 죽음의 장애는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에 의해 극복되었다. 악마의 지배는 그리스도가 지하세계(Hades)에 내려가심으로 극복되었다.
케사리아의 에우세비오스(263-339)와 교부들의 전통에 따르면 (교회에 의해 계속되고 있는) 그리스도의 사명은 예언자, 사제, 왕의 삼중직이다.
예언자로서 예수는 하느님의 진리, 곧 자신이 육화한 진리요 길이요 생명이라는 것을 인류에게 가르쳤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그 명확성과 분명함과 단순함과 완결성에 의해 특징지어진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가르침을 자신의 삶으로 보여준 교사이다.
사제로서 그리스도는 당신 자신을 ‘세상의 생명을 위하여’ 희생제물로 바치신다. 십자가에서 자신을 희생함으로써 그리스도는 ‘당신의 고귀한 피로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구하시고’, ‘인류에게 불멸을’ 주신다.(성대주간의 성가에서) 십자가에서 흘린 피가 우리의 죄를 씻어 버린다. 그 피가 아담(사람)의 두개골과 마른 뼈들 위에 떨어졌을 때 (거룩한 전승에 따르면 아담의 무덤이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 아래에 있었다.) 그 두개골과 뼈들은 다시 살아났다. 독을 머금은 인간의 피는 생명을 주는 하느님의 피로 바뀌었다.(십자가현양 축일의 성가에서) 십자가 위에서 이루어진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인간은 생명을 다시 회복하였다.
그리스도는 지상의 삶을 통틀어서 왕이시다. 왜냐하면 그분은 하느님의 나라를 세우시고 선포하시기 위해 오셨기 때문이다.(마태오 4:17을 보라) 그러나 왕으로서 그분이 지녔던 최고의 임무들은 십자가 자체와(왜냐하면 성 요한 흐리소스톰에 따르면 그리스도는 자신의 신하들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놓는 왕으로서 죽으시기 때문이다.) ‘만대로부터 그곳에 잠들어 있는 이들’에게 구원을 선포하기 위해 저승에 내려가심(성대금요일의 성가), ‘죽음으로 죽음을 멸하시고 무덤에 있는 자들에게 생명을 주신’ 부활(부활성가), 그리스도가 다시 성부의 영광 속으로 들어가신 승천, 그리고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재림 등이다.
- d) 성령의 사명
구원계획(신적 경륜)의 마지막 부분은 하느님의 거룩한 영에 의해 완수된다.(성령의 경륜)
구약시대에 하느님의 영은 그리스도가 오실 것을 준비하고, (가브리엘 대천사가 예수탄생을 성모님에게 알린) 성모희보 때 그리스도의 육체를 축성하는 기름이 되며, 지상에서 이루어진 그리스도의 사역 내내 동행하고, 교회의 성사적 생활을 통해 구원하고 신화시키는 그리스도의 사역을 그리스도인 각자에게 적용한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인간적) 본성 안에서 구원과 신화를 객관적 방식으로 성취하였다. 성령은 구원과 신화를 주관적 방식으로 우리의 인격에 적용한다. 하느님의 은총과 교회, 신비의 성사들은 성령의 작용이다.
- e) 하느님의 은총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해 얻게 되고 은총과 성화의 근원인 성령에 의해 주어진, 하느님의 구원하고 신화시키는 에너지를 신적 은총에 의해 이해한다.
성령의 작용인 신적 은총은 거저 주어지는 선물로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필요하며, 강제적인 것이 아니면서 우리의 협력을 요청한다. 하느님의 은총에 대한 우리의 반응은 우리가 행하는 사랑의 행위들이며, 이는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느님의 은총이 맺는 열매들이다. 우리는 하느님의 은총에 의해 의롭다고 인정된다. 그러나 ‘의로운 열매(행실)’이 없으면 이 의화(義化)는 실재가 아니다.
- f) 그리스도의 교회
성령의 구원하고 신화시키는 은총이 작용하는 곳은 그리스도의 교회이다. 교회는 동시에 성삼위와 하느님의 백성, 그리스도의 몸, 성령의 전을 가리키는 형상이다. 교회의 완전한 모습을 위해 이런 측면들이 모두 다 필요하다.
교회는 그리스도가 세상에 세운 구원의 위대한 성사이다. 교회는 구원의 방주이고, 이미 시작된 하느님의 나라이다. 교회의 일치성은 분열과 이단에 의해 영향받지 않는다. 교회의 거룩성은 죄에 의해 침해되지 않는다. 교회의 보편성과 진리는 편파성과 오류에 의해 손상되지 않는다. 사도들 위에 세워진 교회는 자신의 사명을 완수하는 일에 결코 실패함이 없이 ‘진리의 기둥’으로서 사도적 사명과 직무를 계속해 나간다.
- g) 성인들과 나누는 친교
교회는 그저 또 하나의 인간적 조직이 아니다. 도리어 교회는 신앙의 삶, 곧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로운 삶과 성령의 삶, 하느님의 삶을 깊이 나누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다. 따라서 교회는 ‘성인들의 친교’로 가장 잘 특징지을 수 있다. 왜냐하면 교회의 모든 구성원들은 그리스도의 거룩한 몸이며 성령의 전이고 하느님의 백성들 안으로 ‘통합되는 의식’(세례)을 통해 거룩한 사람이 되도록 부름받기 때문이다. 지상에서는 투쟁하고 천상에서는 승리한 교회는 같은 은총의 수단들, 곧 거룩한 신비의 성사들을 공유하는 단 하나의 가족이다.
- 정교의 종말론
교회와 신비의 성사적 삶을 통해 역사하는 하느님의 성령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의 계획이 완성되도록 이끈다. 세상에서 역사하는 악에 대한 마지막 전투는 주님의 재림 바로 이전에 일어날 것이다. 그동안은 세상에 있는 악과 어둠의 세력에 대한 투쟁이 지속되며, 교회에는 약간의 승리가 있고 성도들에게는 약간의 좌절이 있게 된다. 이것이 정상적인 교회의 삶이며, 이미 시작된 하느님의 나라이면서 그러나 아직 완전히 그 나라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이다. 정교의 종말론에 관해서는 두 개의 서로 다른 단계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곧, ‘부분적’이거나 ‘실현된’ 종말론인 ‘부분적 심판’이 그 첫 단계이고, 주님이 다시 오실 때, 곧 이 세상의 끝날에 이루어질 ‘마지막 심판’이 그 둘째 단계이다.
- a) 부분적 심판 – 우리들 죽음의 시간
우리가 지금도 겪고 있는, 첫 사람의 죄로 말미암은 육체적 죽음은 두 가지 방식으로 나타난다.
- 특별히 그리스도와 그 분 안에 있는 영생을 믿지 않는 이들에게는 일종의 재앙으로서 부정적으로.
-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창조주를 만나도록 이끌어 주는 성숙과정의 끝으로서 긍정적으로. 그리스도는 ‘마지막 적’인 죽음의 힘을 분쇄하셨다.(고린토 1서 18:26)
그 이름에 합당한 그리스도인은 영적 또는 영원한(종말론적) 죽음이 동반되지 않는 한 이런 육체적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부분적인 심판은 우리의 육체적 죽음 이후에 즉시 이루어지며, 이로 인해 우리는 (의인들에게 주어지는) 부분적 축복이나 (의롭지 못한 이들에 임하는) 부분적 고통의 중간 상태에 놓이게 된다.
‘연옥’에 대한 서방교회의 믿음을 거부하는 한편, 정교회는 중간 상태 또는 단계에서 어떤 변화가 가능하다고 믿는다. 투쟁하고 승리한 교회는 여전히 하나이며, 이는 우리의 기도와 거룩한(또는 죄많은) 삶으로써 여전히 서로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음을 뜻한다. 이것이 바로 돌아가신 분들을 위해 기도하는 까닭이다. 또한 물론 자선을 행하는 사람이 누군가의 구원을 (물질로써) ‘산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죽은 이를 대신해서 행하는 자선이 그들에게 어떤 도움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 b) 보편적 심판 – 그리스도의 재림
초대교회는 ‘주님의 날’ 곧, 주님이 다시 오실 날을 고대하며 살았다. 나중에 교회는 그 시간이 오로지 하느님에게만 알려져 있음을 깨달았다. 그래도 여전히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몇몇 징조들이 알려졌다.
- 복음이 온 세상에 선포될 것이다.(마태오 24:14; 루가 18:8; 요한 10:16)
- 유대인들이 그리스도께로 돌아올 것이다.(롬 11:25-26; 호세아 3:5 참조)
- 엘리야 또는 에녹마저 되돌아올 것이다.(마르코 9:11)
- 많은 거짓 예언자들을 거느리고서 적그리스도가 나타날 것이다.(요한 1서 2:10; 데살로니카 2서 2:3; 마태오 24:5)
- 물리적 현상들, 대격변, 전쟁과 고통스런 일들이 일어날 것이다.(마태오 24:6; 마르코 13:26; 루가 21:25) 그리고,
- 세상이 불로 파괴될 것이다.(엑피로시스 ekpyrosis ; 베드로 2서 3:7)
이 모든 징조들은 때가 되면 나타날 것이며, 이런 일이 있지 않고는 마지막 때가 오지 않을 것이다.
죽은 이들의 부활은 주님의 재림 때에 일어날 기적이다. 신앙의 신조에 따르면, (우리는) ‘죽은 이들의 부활을 기다린다’ 이 부활은 새로운 창조가 될 것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육체적인 몸은 부활하신 주님의 몸처럼 영화된 존재로서 회복될 것이다.
마지막 심판은 모든 이들의 부활에 뒤따라 있을 것이다. 어떤 이들은 생명의 부활로 살아날 것이고, 어떤 이들은 심판과 단죄의 부활로 일어날 것이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행위, 곧 사랑의 행위나 사악한 행위의 토대 위에서 심판자가 되실 것이다.
세상의 끝날은 선과 악 사이의 영원한 분리로 마쳐질 것이고, 하늘나라의 지복, 영원히 지속되는 행복한 삶이 주어지는 이들과 반대로 영원한 지옥의 불에 처해져 하느님과 그 분 안에 있는 참된 삶을 거역하고 악마와 그 졸도들이 만들어낸 거짓된 삶을 살아온 것에 대한 끝없는 양심의 회한에 사로잡힐 이들 사이의 분리로 마감될 것이다.
의인들이 사는 새 하늘과 새 땅이 세워질 것이다.(베드로 2서 3:13) 하느님의 나라가 완전히 수립될 것이다. 교회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하느님의 아들이 그 나라를 성부 하느님께 되돌려 드릴 것이고, “하느님께서 만물을 완전히 지배하시게 될 것이다.”(고린토 1서 1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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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존 메이엔도르프, 비잔틴 신학 – 역사적 변천과 주요 교리 그레고리오스 박노양 옮김 (서울: 정교회 출판사, 2010년)
블라디미르 로스끼, 동방교회의 신비신학에 대하여 박노양 옮김(서울: 한국장로교 출판사, 2003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