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교 신앙에 대하여
- 정교 신앙 서론 – 비정교 신자의 정교회 입문.
- 하느님의 집 – 성당 내부에 대한 설명
- 예배 – 정교 예배의 형식과 특징들에 대하여
- 리뚜르기아 – 성찬 예배의 거행과 의미에 대하여
- 성사들 – 전례적 삶의 의미와 중요성에 대하여
- 각종 축복예식 – 영적 삶을 강화하는 준성사 예식들에 대하여
- 가르침 – 교리와 신앙 고백의 핵심에 대하여
- 영성 – 그리스도교적 삶의 목표로서의 신화(테오시스)의 의미에 대하여
- 역사 – 정교 신앙의 위대한 세기들
- 교회 – 정교회의 신자(구성원)이 되는 절차와 과정에 대하여
- 정교 신앙 서론
다양한 계층과 배경에 속한 수많은 사람들이 점점 더 정교회에 흥미를 갖고 있습니다. 이들은 고대의 신앙과 정교회의 풍부한 전통들을 발견해가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과 그의 나라에 관한 정교회의 신비로운 관점, 정교 예배의 아름다움, 정교 그리스도교 신앙의 순결성, 그리고 정교회의 과거와의 연속성에 매료되고 있습니다. 이것들은 사도 시대로까지 이어지는 역사를 지닌 정교회가 지니고 있는 보물들의 일부일 뿐입니다.
동방 그리스도교
정교회는 동방 그리스도교의 풍부한 영적 보화들을 담고 있고 표현합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먼저 선포된 곳, 최초의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세워진 곳은 지중해를 둘러싼 지역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바로 이 지역, 고대 로마 제국의 동쪽 지역에서 그리스도교 신앙은 이교도와 이단들에 맞선 투쟁 속에서 성숙해졌습니다. 위대한 교부들이 살았고 가르쳤던 곳도 바로 그곳입니다. 우리 신앙의 근본적인 요소들이 일곱 번의 세계 공의회를 통해 선언된 곳도 바로 동방의 도시들입니다.
동방에서 양육된 그리스도교 정신은 특별합니다. 그것은 비록 반드시 대립된다고는 할 수 없지만, 로마제국의 서쪽지역에서 발전되고 서방 중세로 이어진 서방 그리스도교 정신과 분명 구별됩니다. 서방 그리스도교가 고대 로마의 법과 도덕철학으로 유명한 땅에서 발전된 반면, 동방 그리스도교는 셈족과 헬레네 문화로 유명한 땅에서 발전되었습니다. 서방이 그리스도의 수난과 인간의 죄에 깊은 관심을 두었다면, 동방은 그리스도의 부활과 인간의 신화(deification), 테오시스(θεοσις)를 강조했습니다. 서방이 종교의 법정적인 관점에 기대었다면, 동방은 더욱 신비적인 신학과 결부되었습니다. 초기 교회는 균일하지 않았습니다. 이 두 위대한 전통은 대분열이 교회를 갈라놓기 전 천년 이상을 함께 존재했습니다. 오늘날, 로마 가톨릭교와 개신교가 서방 전통의 계승자라면, 정교회는 동방 전통의 계승자입니다.
정통 교회
동방 그리스도인들은 스스로를 정통이라 부릅니다. 이렇게 부르는 것은 5세기부터 우리에게 이어져 온 것이고, 매우 밀접한 두 가지 의미를 가집니다. 정통이라는 말의 첫 번째 정의는 “참된 가르침”입니다. 정통 교회(정교회)는 오류와 왜곡으로부터 자유로운 그리스도교 신앙을 사도들의 시대로부터 지금까지 지키고 계승해 왔다고 믿습니다. 두 번째 정의는, “참된 기도”입니다. 실제로는 이 두 번째 정의를 더 선호합니다. 성부 성자 성령이신 하느님을 찬미하고 그분께 기도하고 영광 돌리는 것은 교회의 근본적인 목적입니다. 교회의 모든 활동들, 교회의 교리 조항들까지도 모두가 다 이 목적을 향하고 있습니다.
때때로 가톨릭이라는 말도 정교회를 정의하는 말로 사용됩니다. 이것은 1세기를 더 거슬러 올라가서 니케아 세계 공의회에서 구현됩니다. 니케아 세계 공의회는 “하나이고 거룩하고 보편되고(가톨릭) 사도적인 교회”를 고백했습니다. 정교회의 관점에서 볼 때, 가톨릭은 교회가 보편적이라는 것 그리고 교회가 모든 시대 모든 지역의 인종과 문화를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또한 교회가 그리스도교 신앙의 충만을 보존하고 있음을 뜻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정교회를 묘사할 때, 그리스, 러시아, 안티오키아 등의 관형어를 쓸 수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표현들은 어떤 교구, 주교구, 대주교구의 문화적 민족적 뿌리를 표현하는 것과 관련된 것입니다.
통일성 안에서의 다양성
정교회는 총대주교구, 독립교구, 자치 교구로 존재하는 교회들의 세계적인 연합입니다. 각 교회는 그 내부 조직에 있어서 독립되어 있고, 고유하고 특별한 관습들을 따릅니다. 하지만 모든 교회는 동일한 신앙과 직제 안에서 통일되어 있습니다. 정교회는 통일성이 획일성을 의미하지 않음을 인식합니다. 콘스탄티노플 교회처럼 어떤 교회들은 역사가 깊고 풍요롭습니다. 반면 핀란드 교회처럼 상대적으로 짧은 역사를 가진 교회도 있습니다. 러시아 교회처럼 광대한 지역을 포괄하는 교회도 있고, 시나이 교회처럼 작은 지역의 관할하는 교회도 있습니다. 각 교회는 주교 회의에 의해 지도됩니다. 주교회의의 의장은 총대주교, 대주교, 수도대주교, 혹은 가톨리코스 등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여러 주교들 중, 콘스탄티노플의 세계 총대주교는 ‘최고 명예의 자리’를 차지하고, ‘동등한 자들 중의 첫째’로 여겨집니다. 서유럽, 남북미, 아시아처럼 정교회가 짧은 역사를 가진 곳에는 여러 독립교회들 중 어느 하나와 직접적으로 연결된 많은 주교구와 대주교구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한국 정교회는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구의 보살핌 아래 있습니다. 많은 차원에서 내적 자치를 누리고, 자신의 대주교를 두고 있지만, 콘스탄티노플의 영적인 지도에 순종하고 있습니다.
2. 하느님의 집
정교회 성당을 방문하는 사람은 보통 성당의 독특함, 그리고 서방 그리스도교 여러 전통의 예배장소와 정교회 성당의 외적인 차이에 깊은 인상을 받습니다. 정교회 성당 내부의 풍부한 색깔, 다양한 이콘들과 아름다움은 많은 가톨릭교회 성당이나 개신교 예배당에서 발견되는 단순성과 날카롭게 대조를 이룹니다. 정교회 성당에 들어서면, 색깔과 빛으로 어우러진 완전한 신세계에 들어선 것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성당의 예술과 디자인은 독특한 예배 분위기를 만들뿐만 아니라 정교 신앙의 근본적인 통찰들을 반영하고 구현합니다.
아름다움과 상징들
정교회는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의 창조주시라고 믿습니다. 창조주께서는 피조세계의 창조적인 에너지를 통해 현존하십니다. 이것은 물질세계가 가치 있고 선하며, 하느님이 자신을 표현하시는 중요한 수단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정교회는 성당 미화와 성사와 예식에서 물질적 피조물을 귀하게 사용한다는 사실을 통해서 이러한 확신을 주장합니다. 예를 들어, “피조물의 맏물인” 빵과 포도주가 감사의 성찬 예배에 봉헌될 때, 그것들은 또한 온 피조세계를 창조주 하느님께 바치는 것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피조세계의 선물들을 사용함에 있어서 조금의 주저함도 없기 때문에, 정교회 성당 내부는 매우 아름답습니다. 특별한 분위기를 창조해내기 위해 고안된 건물은 기쁨의 느낌, 하느님의 너그러우심에 대한 감사로 가득 찹니다. 정교회 신자는 아름다움이 인간 삶의 중요한 차원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콘과 교회에서 이콘의 사용을 통해서 피조세계의 아름다움은 하느님께 기도하는 매우 중요한 수단들이 됩니다. 물질세계의 신성한 선물들은 인간의 손을 통해서 창조주께 영광 돌리는 아름다움의 표현으로 빚어지고 주조됩니다. 경건한 여인이 값비싼 기름을 우리 주님의 발 위에 부었던 것처럼, 항상 정교회는 하느님께 최선의 아름다운 것을 바치려 합니다.
거룩한 공간
정교회 성당 내부는 가장 중요하게는 정교 예배를 위한 배경과 무대입니다. 예술과 건축은 지성과 느낌과 감각을 두루 포함하는 총체적인 예배 경험에 기여하도록 고안됩니다. 감사의 성찬 예배와 여타의 신비로운 성사들은 하느님 안에서 일어나고, 하느님의 현존과 행위를 증거합니다. 그러므로 정교 전통 안에서, 성당은 하느님의 집, 하느님의 영광이 머무는 장소라는 강력한 느낌이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모든 정교회 성당은 거룩한 공간으로 축복되고 축성되고 구별됩니다. 성당 전체가 백성 가운데 머물러 계시는 하느님을 증언하고 표현합니다. 하나의 오래된 교훈이 우리에게 이렇게 말해줍니다.
“그리스도인은 성당에 들어갈 때마다 하늘에 들어가고 있음을 잘 생각해야 합니다. 하늘에 계신 하느님의 위엄이 그분의 성당 안에도 똑같이 현존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이런 생각으로 두려움과 공경심을 가지고 성당에 들어가야 합니다.”
정교회 성당은 예배 공동체의 느낌을 강조하고 진작시키기 위해 상대적으로 작게 지어집니다. 성당은 보통 십자가 형태로 건축되고 예비신자석, 신자석, 지성소 이렇게 크게 세 공간으로 나뉩니다. 예비신자석은 성당 출입구와 맞닿아 있습니다. 수세기 전까지만 해도 이곳은 세례를 받지 않은 예비신자들과 참회 신자들이 성찬 예식이 거행되는 동안 머무는 곳이었습니다. 오늘날도, 세례 예식의 시작과 어떤 교구에서는 결혼예식이 바로 이 예비신자석에서 시작되어 신자석으로 이동하기도 합니다. 이 이동은 상징적으로 하느님 나라로의 점진적인 이동을 상징적으로 표상합니다. 많은 정교회 교구들에서, 예비신자석은 신자들이 신자석에 들어가서 회중과 하나가 되기 전에 봉헌초를 사서 이콘 앞에 초를 밝히면서 개인적으로 기도드리는 공간입니다. 신자석은 성당 한가운데의 넓은 장소입니다. 신자들은 예배를 위해 이곳에 함께 모입니다. 비록 우리 시대의 대부분의 정교회 성당은 좌석을 갖추고 있지만, 어떤 성당들은 옛 관습을 따라 좌석이 없는 텅빈 공간으로 남겨둡니다. 신자석의 오른쪽에는 주교좌가 있고, 주교는 그곳에서 백성들 한가운데 계신 그리스도의 살아있는 형상으로서 예배를 주재합니다. 주교가 부재할 때도, 주교좌는 언제나 개별 사목구 성당이 고립한 개체가 아니라 주교를 머리로 둔 주교구의 한 부분임을 상기시켜줍니다. 신자석의 왼쪽에는 복음경이 봉독되고 강론이 행해지는 봉독대가 있습니다. 성가대와 봉독자는 주로 신자석 한 쪽 먼 곳에 자리 잡습니다. 지성소는 오직 성직자들과 복사들만 드나들 수 있는 곳으로, 성당에서 가장 거룩한 부분입니다. 지성소에는 거룩한 제단이 있고, 성화벽(이코노스타시스)으로 신자석과 분리됩니다. 이 분리는 하느님의 통치가 아직 완성되지 않았고 우리는 죄로 인해 여전히 하느님으로부터 분리되어 있다는 것을 상기시켜 주기 위한 것입니다. 하지만 신성한 리뚜르기아가 거행되는 동안, 우리가 거룩한 선물(성체 성혈)에 다가갈 때,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늘과 땅이 하나가 되었고 그분을 통해서 우리가 아버지께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음을 기억합니다. 모든 예식이 다 지성소에서 거행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두어야 합니다. 많은 예식들이 신자석 중앙, 회중 한 가운데서 거행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정교회는 교회의 예배가 온 백성에 의해, 온 백성을 위해 봉헌된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제단
제단 혹은 거룩한 식탁은 정교회 성당의 심장이고 중심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명하신 대로, 빵과 포도주로 된 감사의 성찬예배 봉헌물을 하느님 아버지께 바치는 곳이 바로 이곳입니다. 보통 사각으로 된 이 제단은 벽에서 떨어져 있고, 종종 천으로 덮여 있습니다. 병자나 죽어가는 사람에게 어느 때고 영성체가 가능하도록 성체를 보관해 두는 성체함이 촛대들과 함께 제단 위에 놓입니다. 신성한 리뚜르기아(감사의 성찬 예배의 또다른 명칭)가 거행되지 않을 때는 제단 중앙에 복음경이 놓입니다. 제단 뒤쪽에는 그리스도의 형상이 결합된 큰 십자가가 있습니다.
이코노스타시스(성화벽)
성화벽은 지성소와 신자석을 분리하는 벽으로 이콘들이 그 위에 배치됩니다. 정교회 성당의 매우 특징적인 요소인 이 성화벽의 기원은 지성소 앞의 낮은 벽 위에 이콘을 올려놓던 고대 관습입니다. 언제부터인가 이콘들은 높이 세워진 벽에 고정되게 되었고, 그래서 이코노스타시스(성화벽)라는 용어가 생겨납니다. 우리 시대의 관습에 의하면, 성화벽은 매우 정교하고 세워지고, 지성소 대부분을 가리기도 하지만, 때로는 매우 단순하면서도 개방적인 형태를 띠기도 합니다. 성화벽에는 예식을 거행하는 동안 사용하는 세 개의 문이 있습니다. 양쪽에는 보제나 복사들이 드나드는 ‘보제문’이 있고 중앙에는 ‘임금의 문’이라 불리는 입구가 있습니다. 보통 예식이 거행되지 않을 때는 커튼이나 문으로 닫아놓아 제단을 가립니다. 임금의 문을 중심으로 해서 오른쪽에는 차례로 그리스도의 이콘과 세례자 성 요한의 이콘이 있고, 왼쪽에는 테오또꼬스(성모님)의 이콘과 성당이 봉헌된 주보성인이나 축일 이콘이 배치됩니다. 이 이콘들에 더하여, 다른 많은 이콘들이 공간 사정과 관습에 따라 추가되기도 합니다.
이콘들
이콘은 정교회의 특징적인 예술 형태인 거룩한 형상입니다. 이콘이 나무에, 혹은 캔버스에, 혹은 모자이크나 벽화로 그려집니다. 이콘은 그리스도, 테오또꼬스 마리아, 성인들과 천사들을 묘사합니다. 이콘은 또한 성탄대축일, 부활대축일과 같이 성경이나 교회 역사 속의 사건을 묘사하기도 합니다. 이콘은 정교회의 예배와 신학에서 매우 두드러진 위치를 점합니다. 이콘은 단순히 장식이나, 감동이나, 교육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점은 이콘은 묘사된 인물의 현존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이콘은 하늘과 땅을 연결해주는 창과 같습니다. 예배를 드릴 때 우리는 산 자와 죽은 자 모두를 포함하는 교회, 이 교회의 일원으로서 예배드립니다. 우리는 지금 영광 속에서 주님과 함께 있는 이들과의 관계를 결코 잃지 않습니다. 이콘을 공경할 때마다 그리고 그 앞에 초를 밝힐 때마다 이 같은 믿음이 표현됩니다. 많은 정교회 성당은 성화벽뿐만 아니라 내벽과 천정 등에도 이콘을 그립니다. 지성소 후면 둥근 벽에는 보통 테오또꼬스와 어린아이 모습의 그리스도를 묘사한 커다란 이콘이 그려집니다. 정교회는 마리아가 하느님과 가장 가까운 사람이라고 믿습니다. 매우 중요한 이 이콘은 하느님 아들의 육화에서 마리아가 차지하는 중요한 역할을 기억하게 합니다. 이 이콘은 또한 교회의 형상입니다. 그것은 또한 우리의 삶 속에 그리스도의 현존을 드러내야 할, 다시 말해 우리의 삶 속에 그리스도를 낳아야 할 우리 각자의 책임을 일깨워줍니다. 성당 가장 높은 곳, 천장 혹은 돔 중앙에는 전능하신 그리스도, 판토크라토르의 이콘이 그려집니다. 이 이콘은 하늘과 땅의 주님으로서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승리자 그리스도를 묘사합니다. 아래쪽으로 내려가며 바라보면, 성당 전체, 피조세계 전체가 그분으로부터 나오는 것처럼 보입니다. 위쪽으로 올라가며 바라보면, 만물이 우리를 주님이신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그분은 “알파와 오메가”, 시작과 끝이십니다. 이것은 정교신앙의 핵심 가르침입니다.
3. 예배
임금이신 우리 하느님 앞에 와서 엎드려 경배합시다.
그리스도 임금이신 우리 하느님 앞에 와서 엎드려 경배합시다.
그리스도 임금이신 우리 하느님 그의 앞에 와서 엎드려 경배합시다.
정교회는 매일을 이 초대와 함께 시작합니다. 저녁기도 예식인 만과 첫 부분에 나오는 이 초대는 정교 신앙의 심장이라 할 수 있는 하나의 태도를 표현합니다. 성부 성자 성령 하느님께 드리는 예배는 정교회의 삶과 정신에 있어서 근본적인 것입니다.
정교회에서 예배는 너무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비정교인에게 정교회를 소개하는 최선의 방법은 바로 신성한 리뚜르기아 혹은 대표적인 성사들 중 하나에 참여해 보도록 권하는 것입니다. 제일 먼저 방문자는 음악과 예식 그 자체에 압도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정교회의 풍미와 풍요한 전통들 그리고 살아있는 신앙을 진정으로 경험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예배 안에서입니다.
예배의 두 가지 차원
예배는 전체 교회를 포함하는 하나의 경험입니다. 우리 각자가 예배를 위해 함께 모일 때, 우리는 사회와 시간과 공간의 경계들을 초월하는 하나의 교회의 지체들로서 그렇게 합니다. 비록 우리가 특정한 시간과 장소에 함께 모일지라도, 우리의 행위는 지역교회를 넘어서서 참된 하느님 나라에 이릅니다. 우리는 살아있는 신자들뿐만 아니라 돌아가신 신자들과 함께 예배드립니다.
정교회 예배에는 두 가지 차원이 있어서, 교회의 많은 예식들에 두루 반영됩니다. 첫째, 예배는 하느님 백성 한 가운데서 하느님의 현존과 행위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흩어진 백성들을 하나로 모으시는 분은 바로 하느님이십니다. 우리가 그분의 현존 안에 들어갈 때 그분은 자기 자신을 드러내십니다. 정교회의 예배는 하느님께서 그분의 백성들 가운데 머무신다는 것, 우리는 그분의 생명을 나눠 갖도록 창조되었다는 것을 아주 생생하게 표현합니다.
둘째, 예배는 하느님 현존에 대해 우리가 감사로서 협력하는 응답이고, 그분의 구원하시는 행위,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과 부활에 대한 기억입니다. 정교회 예배는 하느님께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하느님은 역사 속에서 행동하셨고, 또 성령을 통하여 지금도 계속해서 행동하십니다. 우리는 그분의 행위들을 되새기고, 기도와 감사로써 그분의 사랑에 응답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점점 더 하느님께 가까이 나아갑니다.
예배의 여러 표현
정교회에서 예배는 네 가지 주요한 방식으로 표현됩니다.
- 감사의 성찬 예배 : 이 예배는 정교회의 가장 중요한 예배 경험입니다. ‘감사’를 뜻하는 에프카리스티아(Ευχαριστια), 혹은 신성한 리뚜르기아(Θεια Λειτουργια)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 성사들 : 성사들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중요한 사건들 혹은 계기들 속에 하느님께서 현존하시고 개입하시고 행동하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모든 주요 성사들은 감사의 성찬 예배와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습니다. 세례 성사, 견진성사, 고백성사, 결혼성사, 신품성사, 성유성사 등이 있습니다.
- 특별한 예식과 축복식 : 이 또한 우리 삶의 모든 사건들, 필요들, 그리고 과제들 속에 현존하시고 행동하시는 하느님을 보여줍니다.
- 매일 예식 : 매일 거행되는 공적인 기도 예식들입니다. 이중 가장 중요한 예식은 아침기도예식인 ‘조과’와 저녁 기도예식인 ‘만과’입니다.
특징들
정교회의 예식들은 정교하고 장엄하고 길고, 또 기쁨이 깊이 스며든 느낌을 표현합니다. 이런 분위기는 정교회 예배의 지배적인 주제인 그리스도의 부활과 인간의 신화에 대한 우리의 신앙을 표현합니다. 이러한 감정을 고취시키고 충만한 참여를 격려하기 위해 예식들은 언제나 노래와 찬미로 불립니다.
예배는 단순히 말로만 표현되지 않습니다. 기도와 성가와 성경 봉독에 더하여, 많은 예식행위와 몸짓, 행렬 등이 있습니다. 교회는 하느님의 현존과 그분과 우리의 관계를 표현하기 위해 비언어적 상징들을 풍부하게 사용합니다. 정교회 예배는 지성, 감정, 감각 등 인간 전체를 온전히 포함합니다.
정교회에서의 예식들은 미리 규정된 순서를 따릅니다. 우리의 예배에는 뼈대와 설계가 있습니다. 이것은 예배의 공통성이라는 차원을 보존하고 과거와의 연속성을 유지하게 하는데 매우 유익합니다. 예식의 내용 또한 정해져 있습니다. 바뀌지 않는 요소들이 있는가 하면, 축일이나, 절기나, 특별한 환경에 따라 바뀌는 부분도 있습니다. 전체 교회에 의해 예식들이 규정되는 것은 예배가 전체 교회의 표현이지, 특별한 사제나 집단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예배의 두 번째로 중요한 목적은 신앙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예배와 교회의 가르침 사이에는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신앙은 예배 안에서 표현되고, 예배는 신앙을 강화하고 전해주는 일에 봉사합니다. 그 결과 정교회의 기도와 성가와 전례적인 몸짓은 가르침의 가장 중요한 매개들입니다. 예식들을 규정하는 것은 또한 참된 신앙을 보존하고 그것을 오류로부터 지키는데 도움을 줍니다.
신성한 리뚜르기아(감사의 성찬 예배)와 성사들의 거행은 언제나 서품된 성직자에 의해 집전됩니다. 지역 성당에서는 보통 사제가 주교의 이름으로 집전하고, 가끔은 보제가 이를 보좌하기도 합니다. 주교가 있을 때는, 주교가 예식을 주재합니다. 성직자들의 의복들은 거룩한 직무로의 특별한 소명과 특별한 지위들을 표현합니다.
정교회에서 예배는 전체 교회의 표현이기 때문에, 신자 회중의 능동적인 참여와 개입을 필요로 합니다. 정교회에는 ‘사적인’ 예식, 혹은 ‘혼자만의’ 예식이 없습니다. 회중이 없이는 어떤 예식도 거행될 수 없습니다. 이같은 강력한 공동체적 감수성은 복수형으로 드려지는 기도들과 권고들로 표현됩니다. 회중은 성가를 부르고, ‘아멘’이라는 화답으로 기도문을 끝맺고, 연도에 ‘주여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응답하고, 십자 성호를 긋고, 절하고, 특별히 신성한 리뚜르기아에서 영성체에 참여하는 등의 행동으로 예식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도록 요구받습니다. 정교회에서는 서있는 자세로 예배드리는 것을 권합니다. 회중은 신성한 리뚜르기아에서 성령의 임재를 기원하는 기도(에피클레시스)를 드릴 때와 같은 특별히 엄숙한 순간들에만 무릎을 꿇습니다.
연도(리타니아)는 정교회 예식에서 중요한 부분입니다. 연도는 사제 혹은 보제와 회중이 함께 드리는 기도문입니다. 그것은 여러 개의 간청 기도문으로 구성되고, 신자들은 “주여 불쌍히 여기소서” 혹은 “주여, 들어주소서”라고 화답합니다. 연도는 예식에서 자주 등장하고, 서로 다른 부분들을 구별해주는 역할을 합니다.
정교회 예배는 항상 회중의 언어로 거행됩니다. 공용의 보편적인 전례 언어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종종 회중의 구성과 필요에 따라 한 예식에서도 두 가지 이상의 언어가 사용되기도 합니다. 전 세계적으로, 그리스어, 슬라브어, 아랍어, 알바니아어, 루마니아어, 영어, 일본어, 한국어 등 거의 모든 언어로 예배가 드려집니다.
4. 거룩한 감사의 성찬 예배
“우리는 하늘에 있는지 땅에 있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지상 그 어디에도 그와 같이 찬란하고 아름다운 것은 없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당신께 묘사할 수조차 없습니다. 다만 하느님께서 거기서 사람들 가운데 머무셨다는 것, 그들의 예배는 다른 모든 곳에서 드려지는 예배를 뛰어넘는 것이었음을 말씀드릴 뿐입니다. …”
10세기 후반, 키에프의 블라디미르 대공은 다양한 그리스도교 중심지에 사절단을 보내서 그들의 예배 모습을 연구하게 했습니다. 위의 인용문은 바로 그 사절단들이 콘스탄티노플의 성 소피아(아기아 소피아) 대성당에서 거행된 감사의 성찬예배에 참여한 후의 감회를 표현한 글입니다. 러시아 사절단이 표현한 이 심오한 경험담은 그 후로도 정교회의 아름답고 영감 넘치는 신성한 리뚜르기아를 처음으로 경험한 수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킵니다.
거룩한 감사의 성찬 예배는 그리스도교 예배의 가장 오래된 경험일 뿐만 아니라 가장 특징적인 예배입니다. 이 예배를 그리스말로는 ‘에프카리스티아(Ευχαριστια)’라고도 하는데, 그것은 ‘감사’를 뜻합니다. 특별한 의미에서, 이 말은 사람의 모든 일에 대한 교회의 태도의 가장 중요한 형태를 표현합니다. 감사의 성찬 예배의 기원은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자신을 기념하여 빵과 포도주를 봉헌하라고 하셨던 마지막 만찬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감사의 성찬 예배는 정교회 예배에서 가장 구별되고 중요한 사건입니다. 왜냐하면 교회가 이 예배 안에서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기억하고 찬양하기 위해 그리하여 구원의 신비에 참여하기 위해 모이기 때문입니다.
정교회에서 감사의 성찬 예배는 ‘신성한 리뚜르기아(Θεια Λειτουργια)’라고도 불립니다. ‘리뚜르기아’라는 말은 ‘백성의 일’을 의미합니다. 이 표현은 감사의 성찬 예배의 공동체적인 특징을 강조합니다. 정교회 신자가 신성한 리뚜르기아에 참여할 때, 그는 더 이상 단지 설교를 들으러 온 고립된 개인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는 성 삼위 하느님께 드리는 예배라는 교회의 참된 목적에 참여하는 신앙 공동체의 일원으로 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감사의 성찬 예배는 개별적인 그리스도인뿐만 아니라 전체로서의 교회에 있어서, 참으로 삶의 중심이고 영적 발전의 주된 통로입니다. 감사의 성찬 예배는 독특한 방법으로 그리스도교 신앙을 구현하고 표현할 뿐만 아니라 성 삼위 하느님에 대한 우리의 신앙을 진작시키고 심화시킵니다. 이 성사, 이 신비는 교회의 다른 모든 활동들이 향하는 목표이고, 또 그로부터 방향성을 얻는 중심입니다.
정교회의 중심적인 성사 신비인 감사의 성찬 예배는 연구되어야 할 텍스트가 아니라 오히려 기도와 음악과 몸짓과 피조 물질과 예술과 건축이 하나의 거대한 오케스트라를 이루는, 살아계신 하느님과의 친교 경험입니다. 감사의 성찬 예배는 마음뿐만 아니라 감정과 감각들까지도 깊이 건드리는 신앙의 예배입니다.
세기를 거치면서 그리스도인들은 감사의 성찬 예배 안에서 다양한 차원들을 보아왔습니다. 이 예식을 표현하는 다양한 명칭들은 그것의 의미의 풍요함을 증언해줍니다. 감사의 성찬 예배는 거룩한 봉헌, 거룩한 신비, 신비의 만찬, 거룩한 친교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정교회는 감사의 성찬 예배의 다양한 측면들을 인정하면서, 지혜롭게도 다른 것들을 해치면서까지 한 가지 요소만 강조하는 것을 거부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정교회는 감사의 성찬 예배를 단지 가끔씩만 거행해도 되는, 마지막 만찬에 대한 단순한 기념으로 환원하는 것을 분명하게 피합니다. 성경과 전통의 가르침을 따라, 정교회는 거룩한 감사의 성찬 예배가 거행될 때 그리스도께서 그의 백성과 함께 계신다는 것을 믿습니다. 감사의 봉헌물인 빵과 포도주는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됩니다. 우리는 이 거룩한 봉헌물이, 궁극적으로 하느님께서 “만물 안의 만물”이 되실 새로운 피조세계의 첫 열매로 변모된다고 확신합니다.
세 가지 리뚜르기아
오늘날 거행되는 신성한 리뚜르기아는 역사적 발전의 산물입니다. 리뚜르기아의 근본 핵심이 되는 요소는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세기를 거치면서 이 핵심 요소에 여러 기도문과 성가와 몸짓들이 추가되어 왔습니다. 리뚜르기아는 9세기 경에 기본적인 뼈대가 완성되었습니다.
정교회에는 현재 세 가지의 리뚜르기아가 거행되고 있습니다.
-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스 리뚜르기아 : 가장 자주 거행되는 리뚜르기아입니다.
- 성 대 바실리오스 리뚜르기아 : 일 년에 열 번 거행됩니다.
- 성 야고보 리뚜르기아 : 성 야고보 축일인 10월 23일에 거행됩니다.
각 성인의 이름을 딴 리뚜르기아라 할지라도, 이 성인들이 전례문 전체를 만든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전례문의 주된 기도문들(특별히 아나포로(Aναφορα)로 알려진 봉헌 기도문)이 그분들의 것이라는 것은 거의 분명합니다. 몇 가지 성가와 기도문은 다르지만, 이 세 가지 리뚜르기아의 구조와 기본 요소는 거의 동일합니다.
이 리뚜르기아들 외에, 또한 ‘미리 축성된 리뚜르기아’가 있습니다. 이것은 온전한 감사의 성찬 예배로 보기는 어려운 예배으로서, 저녁 기도 예식인 만과에 이어서 직전 주일에 축성되어 보관해 둔 성체성혈을 영하는 예식입니다. 이 리뚜르기아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는 감사의 성찬 예배를 온전한 방식으로 드리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 철저한 금식 기간인 사순대제와 성대주간의 월요일, 수요일 금요일에 거행됩니다. 감사의 성찬 예배는 복음에 있어서 가장 중심이 되는 이 깊은 기쁨, 주님의 부활을 경축하고 표현합니다.
신성한 리뚜르기아는 하루에 오직 한번만 거행됩니다. 이러한 전통은 지역 교회 공동체의 통일성을 강조하고 유지케 해줍니다. 일요일(주일)과 대축일에는 언제나 감사의 성찬 예배가 거행되고, 평일에도 필요하다면 거행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성한 리뚜르기아는 회중의 참여 없이 사제 혼자 개인적으로 거행될 수 없습니다. 감사의 성찬 예배는 보통 아침에 거행되지만, 주교의 축복으로 저녁에 봉헌될 수도 있습니다.
리뚜르기아의 행위들
신성한 리뚜르기아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뉩니다. 예비신자들의 리뚜르기아와 세례신자들의 리뚜르기아가 주된 구성부분이고, 이 두 부분에 앞서 준비예식이 거행됩니다.
신성한 리뚜르기아에는 많은 상징적 해석들이 포함되어 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근본적인 의미들은 행위들과 기도들에서 발견됩니다.
준비 예식
리뚜르기아가 시작되기 전에, 사제는 기도로 자기 자신을 준비하고, 이어서 제의를 입습니다. 제의들은 그의 성직과 임무들을 표현합니다. 그 다음 사제는 지성소 안 제단 왼편에 자리잡고 있는 예비제단으로 가서 프로스꼬미디(봉헌물 준비 예식)를 거행합니다. 거기서 사제는 리뚜르기아에 사용될 봉헌물인 빵과 포도주를 준비합니다. 리뚜르기아에 사용될 누룩 넣은 빵과 포도주는 회중이 봉헌합니다. 이 두 봉헌물은 예식이 시작되기 전에, 신성한 리뚜르기아가 거행되는 동안 기억되고 추념되길 원하는 산자와 죽은 자의 명단과 함께 사제에게 봉헌됩니다. 봉헌은 그리스도, 즉 하느님의 어린 양 곁으로 모인 전체 교회를 상징적으로 표상합니다.
예비신자들의 리뚜르기아
신성한 리뚜르기아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나라가 이제와 항상 또 영원히 찬미되나이다.”라는 장엄한 선언으로 시작됩니다. 이 선언의 말을 통해서 우리는 신성한 리뚜르기아 안에서 교회는 이미 이 땅에 드러난 참된 하느님 나라가 됨을 되새깁니다.
리뚜르기아의 첫 번째 부분은 본래부터 예비신자들을 위해서 고안된 것이지만, 신앙으로 교육받은 이들 또한 매우 교육적인 유익함을 누립니다. 감사의 성찬예배는 또한 다른 예식들과 공통된 요소들을 가집니다. 우리는 거룩한 삼위일체에 대한 공통의 신앙을 나누는 그리스도인으로서 함께 모입니다. 우리는 시간과 공간 혹은 사회적 장벽들에 의해 갈라질 수 없는, 그리스도 안에서 연합된 백성으로서 노래하고 기도합니다.
소입당은 리뚜르기아의 첫 번째 부분의 중심이 되는 행위입니다. 이때 사제는 복음경을 들고 지성소에서 나와 신자석을 거쳐 다시 지성소로 들어가는 행렬을 거행합니다. 행렬은 우리의 관심을 성경으로, 그리고 또한 복음경을 통한 그리스도의 현존으로 향하게 합니다. 소입당에 이어서 사도경과 복음경이 봉독되고, 강론이 행해집니다.
세례신자들의 리뚜르기아
초기 교회에는 세례 받은 신자들 중에서도 죄의 상태에 있지 않은 사람들만 리뚜르기아의 이 장엄한 순간에 남아있도록 허락되었습니다. 리뚜르기아의 이 부분을 개시하는 대입당 때 사제는 빵과 포도주 봉헌물을 들고 예비제단에서 나와 신자석을 통과하여 지성소의 제단으로 옮겨놓습니다. 그리고 봉헌 기도가 시작되기 전에, 우리는 서로서로 사랑하여 하나가 될 것을 요청받습니다. 그래서 참으로 완벽하게 우리의 신앙을 고백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초기 교회에서는 평화의 입맞춤이 바로 이 순간에 행해졌습니다. 상징적인 평화의 입맞춤이 행해진 뒤, 우리는 하나가 되어 니케아 콘스탄티노플 신경으로 우리의 신앙을 고백합니다.
이제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그분을 기념하여 행하라고 지시하신 것처럼, 참되게 우리의 봉헌물인 빵과 포도주를 하느님 아버지께 바칠 수 있습니다. 이 봉헌은 위대한 기쁨의 봉헌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로 하여금 구원의 은총을 받아 누리게 하신 하느님의 모든 권능 있는 행위들, 특별히 그리스도의 삶과 죽으심과 부활을 기억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봉헌물이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되도록, 우리 자신과 우리의 봉헌물 위에 성령을 보내주시길 하느님 아버지께 간청 드립니다. 우리의 감사와 기억을 통해서 성령은 우리 가운데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현존하심을 드러내십니다.
사제는 거룩한 선물, 즉 성체성혈을 들고 제단에서 나와, 회중들에게 “하느님에 대한 두려움과 믿음과 사랑을 가지고 가까이 나오라”고 초대합니다. 우리가 감사의 성찬을 나누는 것은 우리들 서로 간의 친교를 표현할 뿐만 아니라 또한 우리가 하느님 나라에서 하느님 아버지와 하나가 되었음을 표현합니다. 신자들은 거룩한 선물에 다가가서, 같은 잔에 담긴 감사의 빵과 포도주, 그리스도의 성체와 성혈을 받습니다. 사제는 영성체 수저로 거룩한 선물을 나눠줍니다. 거룩한 영성체는 우리 신앙의 표현이기 때문에, 영성체는 오직 세례성사와 견진 성사를 받고 정교회의 일원으로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만 허용됩니다.
리뚜르기아는 감사 기도와 축복 기도로 끝맺습니다. 감사의 성찬 예배가 끝난 후, 온 회중은 사제에게 나아가 성찬 봉헌물로 축성되는데 사용되지 않은 봉헌 빵의 나머지 부분을 ‘축복된 빵’(안티도론)으로 나눠 받습니다.
- 성사들
정교회의 가장 잘 알려진 기도 중 하나는 “어디에나 현존하시며 모든 것을 채우시는” 하느님의 성령에 대해 말합니다. 이 근본적인 확신은 하느님에 대한, 그리고 하느님과 세상의 관계에 대한 정교회의 기본적인 이해를 보여줍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진정 우리와 가까이 계신다고 믿습니다. 비록 볼 수 없지만 하느님께서는 그분의 피조세계와 단절해 계시지 않습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성령, 이 두 신격을 통하여, 하느님께서는 우리 삶 안에서, 우리가 속한 피조세계 안에서 현존하시고 활동하십니다. 우리의 삶과 우리가 속해있는 피조세계는 하느님을 지향하고 하느님을 드러냅니다.
정교회 그리스도인의 공동체적 삶에는 특별한 경험들이 있습니다. 그 경험들 안에서 하느님의 현존과 행위에 대한 인식은 드높여지고 찬미됩니다. 우리는 이 사건들을 교회의 성사들이라고 부릅니다. 전통적으로 정교회는 성사를 ‘신비(Μυστεριον, 미스떼리온)로 인식해 왔습니다. 이러한 표현은 하느님께서 교회의 이 특별한 사건들 안에서 그 백성의 기도와 행위들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신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성사들은 하느님을 우리에게 드러내주고 계시해줄 뿐만 아니라 또한 우리가 하느님을 받아들이게 해줍니다. 모든 성사들은 하느님에 대한, 그리고 우리들 서로에 대한 우리 각자의 인격적 관계에 깊이 작용합니다. 성령께서는 성사들을 통하여 일하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그리스도께 인도하고, 그리스도는 우리를 하느님 아버지와 연합시켜주십니다. 성사에 참여함으로써 우리는 성장하여 점점 더 하느님과 가까워지고 성령의 은총들을 받아 누리게 됩니다. 정교회 신앙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인 이 신화의 과정, 테오시스의 과정은 다른 이들과 고립된 상태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 일어납니다. 비록 성사들은 우리 각자의 이름을 부르며 거행되지만, 그것은 또한 교회 전체를 포괄하는 표현들입니다. 정교회의 성사들은 기도와 성가와 성경봉독과 몸짓과 행렬 등으로 구성됩니다. 성사예식들의 주요한 요소들은 사도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정교회는 성사들을 특별한 본문이나 행위로 축소해버리는 것을 피해왔습니다. 그래서 성사는 일련의 거룩한 행위들 전체로 구성됩니다. 대부분의 성사들은 피조세계 안의 특정 물질들을 하느님 계시의 외적이고 가시적인 표징으로 사용합니다. 물, 기름, 빵, 포도주는 정교회가 예배에서 사용하는 많은 물질적 요소들 중의 몇 가지 중요한 예에 불과합니다. 피조세계의 물질을 자주 사용하는 것은 물질은 선한 것이고, 성령의 매개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일깨워줍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정통 그리스도교(정교) 신앙의 핵심 진리, 즉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육체가 되셨다는 것, 그리고 피조세계 한 가운데 들어오시어 온 우주를 창조주 하느님께 영광 돌리는 본연의 소명으로 향하도록 재정립한다는 진리를 확증한다는 점입니다.
감사의 성찬 예배(에프카리스티아)
신성한 리뚜르기아라고도 하는 거룩한 감사의 성찬 예배는 정교회에서 가장 중요하고 중심적인 예배 경험입니다. 종종 “성사들 중의 성사”라고 칭해지기도 하는 이 성사는 교회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경축하는 것으로서, 매주 일요일과 대축일에 봉헌됩니다. 교회의 다른 모든 성사들은 교회의 삶에 있어서 중심에 있는 이 감사의 성찬 예배로 인도되고, 그로부터 흘러나옵니다. 앞의 장에서 우리는 정교회에서 감사의 성찬예배가 어떻게 거행되고 그 의미는 무엇인지에 대해서 이미 서술한 바 있습니다.
세례성사
세례 성사는 우리를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와 하나로 결합시켜주고, 성 삼위 하느님의 생명에 들어서게 해줍니다. 물은 삶의 정화와 갱신의 자연적 상징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 성 삼위 하느님의 이름으로 세례의 물 속에 세 번 들어갔다 나오는 침례를 통해 우리는 죄의 삶의 방식에 대해서는 죽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 생명으로 태어납니다. 세례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그분의 승리의 부활과의 공개적인 동일화입니다. 초기 교회의 관습을 따라서 정교회는 유아의 세례를 권장합니다. 유아에게 베풀어지는 세례 성사는 하느님께서 아이를 선택하시어 그 백성의 중요한 일원으로 삼으셨음에 대한 증거라고 교회는 믿습니다. 세례 받은 날부터 아이들은 가정과 교회를 통하여 영적인 삶 안에서 성숙해져 갑니다. 성인의 세례는 대상자가 성 삼위 하느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지 않았을 경우에 거행됩니다.
견진성사
정교회에서 견진성사는 세례에 연이어 거행되는 것으로 결코 몇 년 후로 연기되는 법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사역이 성령에 의해 생동하게 되었고, 사도들의 설교 또한 성령에 의해 강력해졌던 것처럼, 정교 그리스도인 각자의 삶 또한 성령을 통해서 성화됩니다. 각 사람의 개인적인 성령강림사건이라 일컬어지는 견진성사는 특별한 방식으로 성령을 전해주는 성사입니다.
견진성사에서 사제는 이제 막 세례를 받은 사람의 몸 여러 곳을 성유로 발라주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성령의 은총의 날인입니다.” 주교의 축복과 함께 만들어지는 성유는 성화와 권능의 표징입니다. 성사는 각 사람이 교회의 가치 있는 구성원일 뿐만 아니라 또한 성령께서 이러저러한 은총과 달란트로 축복해주신 존재라는 진리를 강조합니다. 기름 바르는 행위 또한 우리의 몸이 가치 있는 것이며 구원의 과정에 포함된다는 것을 상기시켜줍니다.
입문성사들은 항상 새로운 세례신자가 성체성혈을 받아 모시는 영성체로 끝납니다. 그리고 영성체는 신성한 리뚜르기아의 거행 안에서 이뤄지는 것이 이상적입니다. 이러한 관습은 정교회가 어린이들을 교회의 중요한 구성원으로 바라본다는 것을 드러내줍니다. 너무 어려서 하느님의 백성에 속할 수 없는 그런 나이는 결코 존재하지 않습니다.
고백성사
교회의 구성원으로서, 우리는 서로에 대해 그리고 또한 하느님에 대해 책임을 집니다. 우리가 죄를 지으면, 하느님과의 관계 그리고 이웃과의 관계는 틀어져 버립니다. 죄는 궁극적으로 하느님으로부터, 인간으로부터 그리고 하느님의 형상을 닮아가도록 창조된 우리 자신의 참된 자아로부터 소외되는 것이고 멀어지는 것입니다.
고백성사는 우리 죄가 용서받고 하느님과 그리고 우리 이웃과 관계가 회복되고 강화되는 성사입니다. 이 성사를 통해서 우리 주 그리스도께서는 마음이 찢겨진 이들을 계속해서 치유하시고 넘어진 자들에게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을 회복시켜주십니다. 정교회의 가르침에 따르면, 고백신자는 하느님께 고백하고 하느님에 의해 용서받습니다. 고백사제는 그리스도와 그의 백성 둘 다를 표상하는 성사적 증인입니다. 사제는 심판자가 아니라 의사요 안내자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영적인 아버지를 갖고 그에게 영적인 충고와 권면을 얻는 것은 정교회의 오래된 관습입니다. 고백성사는 얼마든지 거행될 수 있습니다. 다만 그 빈도는 각 개인의 재량에 맡겨집니다. 하지만 심각한 죄를 범한 경우에는 거룩한 영성체전에 반드시 고백성사를 행해야만 합니다.
결혼성사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삶 속에서 활동하십니다. 남자와 여자를 상호간의 사랑의 관계로 묶어주시는 분도 하느님이십니다. 결혼성사는 바로 하느님의 이 행위에 대한 증언입니다. 성사를 통해서 남자와 여자는 공개적으로 남편과 아내로 결합됩니다. 그들은 상호간, 그리고 하느님과 교회와의 관계에서 새로운 관계성 안으로 들어갑니다. 정교회에서 결혼은 법적인 계약이 아니기 때문에, 결혼성사에서는 서약이 없습니다. 정교회의 가르침에 따르면 결혼은 단순한 사회제도가 아닙니다. 그것은 하느님 나라로의 영원한 소명입니다. 남편과 아내는 함께 살아갈 뿐만 아니라 함께 그리스도교적인 삶을 공유하도록 성령에 의해 부름 받습니다. 그래서 각자는 상대방의 도움으로 더욱 성장하여 하느님께 가까워지고, 그래서 본래 그러하도록 부름 받은 신화된 인격으로 변화되어 갑니다. 정교회의 결혼 성사에서 부부는 약혼하고 반지를 교환한 후, “영광과 영예의 관”을 씁니다. 이것은 하느님 아래서 새로운 가족이 세워졌음을 의미합니다. 예식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가나의 혼인잔치를 상기시켜주고 그들이 새로운 삶에서 모든 짐과 기쁨을 함께 나눠가질 것임을 의미하는 의식으로, 남편과 아내가 공동의 잔을 함께 나눠 마십니다.
신품 성사
성령께서는 신품성사를 통해서 교회의 연속성을 지켜주십니다. 신품성사를 통해서, 교회 안에서 선택된 사람은 교회에 의해 교회의 특별한 봉사직으로 따로 세워집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분의 백성을 통해서 서품대상자를 공동체 안에서 목사와 교사 그리고 제단 앞에서 회중을 대표하는 사람으로 부르시고 세우십니다. 서품된 사람은 그리스도의 백성 안에서 그리스도의 살아있는 형상입니다. 정교회의 가르침에 따르면, 신품성사의 과정은 지역의 회중과 함께 시작됩니다. 하지만 보편 교회의 이름으로 행동하는 주교 혼자만으로도 이 행위를 완수할 수 있습니다. 주교는 성령의 임재를 간구하는 기도와 서품되는 사람의 머리 위에 그의 손을 얹는 안수를 통해서 그렇게 합니다.
사도적인 교회의 관습을 따라서, 각각 특별한 신품예식을 갖는 세 개의 주요한 품계가 있습니다. 사도들의 계승자인 주교, 그리고 주교의 이름으로 행동하는 사제와 보제가 그것입니다. 각 품계는 사목적 책임에 따라 구별됩니다. 오직 주교만이 서품을 줄 수 있습니다. 종종 다른 칭호와 예식들이 이 세 품계와 결부되기도 합니다. 정교회는 결혼한 사람도 서품을 받을 수 있도록 허용합니다. 하지만 6세기부터 주교는 오직 독신 사제 중에서 선택되어 왔습니다.
성유성사(병자성사)
사람이 병들거나 고통 중에 있을 때, 외로움과 고립감을 느끼는 삶의 위기의 순간들을 맞습니다. 병자를 위한 성유성사는 우리가 육체적으로, 감정적으로, 혹은 영적으로 고통 받을 때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이 직무들을 통해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을 상기시켜줍니다. 그분은 우리 가운데 계시면서 삶의 도전들과 임박한 죽음에 직면할 수 있는 힘을 제공해주십니다.
견진성사에서처럼 이 성사에서도 기름은 하느님의 현존과 능력과 용서의 표징으로 사용됩니다. 치유를 주제로 한 사도경 본문과 복음경 본문이 일곱 개씩 봉독되고, 그에 더해지는 일곱 번의 기도가 이뤄진 뒤, 사제는 신자의 몸에 성유를 발라 줍니다. 정교회는 이 성사를 오직 임종을 앞 둔 사람에게만 베풀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몸이나 마음 혹은 영이 병든 모든 사람에게 제공됩니다. 정교회는 성대주간 성 대 목요일에 교회의 모든 구성원들에게 이 성사를 베풉니다.
그 밖의 거룩한 예식들과 축복식
정교회는 특별히 성사의 숫자를 정한 적이 없습니다. 감사의 성찬 예배에 더하여, 교회는 이상에서 언급한 여섯 가지의 신비를 주요 성사로 받아들입니다. 왜냐하면 이 성사들은 공동체 전체를 포함하고 있으며, 더 중요하게는 감사의 성찬 예배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밖에도 주요 성사들을 보충해주고 백성의 삶 속에서 교회가 현존하다는 것을 반영해주는 다른 많은 축복식과 예식들이 있습니다. 이들 중 몇몇 예식은 다음 장에서 설명될 것입니다.
- 특별 예식들과 축복식들
교회의 삶의 중심에는, 우리 신앙의 가장 중요한 예배, 성 삼위 하느님의 참된 생명에 우리가 참여할 수 있게 해주는 감사의 성찬 예배가 있습니다. 주요 성사들은 감사의 성찬 예배와 밀접하게 관계되어 있고, 이를 통해 그리스도의 백성의 삶 안에 그리스도께서 계속적으로 현존하심을 확증해줍니다.
감사의 성찬 예배와 주요 성사들과 함께, 정교회는 인간의 삶의 다양한 필요와 사건과 임무들과 결부된 많은 수의 특별 예식과 축복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다양한 예식과 축복식을 거행함으로써 교회는 끊임없이 우리 삶 속에서 활동하시는 하느님의 현존과 사역을 증언합니다. 우리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돌보시고 언제나 우리 가까이에 계신 분이십니다. 전례 예식과 축복식은 또한 삶의 모든 것이 중요하다는 것, 삶의 수많은 사건들과 선물들이 하느님을 향하도록 정향될 수 있고 또 하느님 안에서 온전한 성취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줍니다.
특별 예식들은, 비록 주요 성사로 간주되지는 않지만 그 역시 공동체 예배의 사건이라는 점에서, 종종 준(準)성사라고 일컬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런 예식들 역시 성 삼위 하느님의 현존을 드러내준다는 점에서 분명 성사적 특징들을 가집니다. 장례예식, 성수식, 수도서원식 등 몇 개만 보더라도, 이 예식들은 교회의 삶에서 매우 의미 깊은 것들입니다. 여러 가지 축복식들은 경우에 따라 행해지고 반드시 교회 공동체 전체를 직접적으로 포괄하지는 않는 간단한 예식들입니다.
교회는 개인들, 여행과 같은 사건들, 성화, 성당, 꽃, 농지, 동물, 음식 등과 같은 물질적 대상들을 축복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교회는 우리의 감사를 표현할 뿐만 아니라, 어떤 선물도 사건도 인간의 책임도 세속적인 것일 수 없고 하느님과 동떨어진 것일 수 없음을 확증합니다. 정교회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모든 선한 것이 하느님 안에 그 기원과 목표를 둡니다. 어떤 것도 하느님의 사랑과 관심 밖에 있지 않습니다.
장례 예식
그리스도인의 죽음은 가족뿐만 아니라 교회 전체에 영향을 줍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표현하고 있는 정교회의 장례 예식은 어떤 감정적인 방법으로 한 개인의 덕행을 칭송하는 기회로 이용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여러 기도와 성가는 죽음의 힘을 정복한 그리스도의 승리의 부활뿐만 아니라 죽음의 냉혹한 현실도 강조합니다. 장례 예식은 애도하는 이들을 위로합니다. 또한 교회가 그리스도교 신앙 안에서 죽은 한 지체를 위해 기도하는 매개가 됩니다. 정교회는 육체적 실존의 종식을 오직 삶의 한 국면의 마감으로만 바라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고, 그리스도의 부활은 이 능력을 확증합니다.
정교회의 장례예식은 세 가지 예식으로 구성됩니다. 먼저 죽음 이후의 철야 예배가 있는데, 보통은 새벽 기상 시간에 거행됩니다. 이 예식은 뜨리사기온 예식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교회는 “당신의 종의 영혼이 고통도 슬픔도 한숨도 없고 영원한 생명이 있는 곳에서 성인들과 함께 안식을 누리게 해달라”고 그리스도께 간구합니다. 교회가 돌아가신 이의 영혼을 위해 기도하는 동안, 시신에 최대한의 예를 기울입니다. 정교회는 그리스도인의 몸이 거룩하다고 믿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성령의 전이기 때문입니다.
시신은 또한 모든 피조세계의 최종적인 회복을 공유하게 될 것입니다. 시신은 매장일에 교회로 옮겨지고, 장례예식은 교회에서 계속 이어집니다. 이상적으로는 신성한 리뚜르기아가 거행됩니다. 장례 예식 후에 회중은 죽은 이와 작별 인사를 나눕니다. 뜨리사기온 예식은 무덤 옆에서 다시 반복하여 거행됩니다.
추도 예식
죽음은 교회의 모든 지체들 간에 존재하는 사랑의 연합을 변모시킬 뿐 파괴하지는 않습니다. 정교회는“부활에 대한 믿음과 희망 안에서 잠든 이들이” 우리의 기도를 통해서 점점 하느님께 가까이 갈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끊임없이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지체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에, 그리고 서로간의 사랑과 용서의 능력에 신뢰를 둡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돌아가신 신자들의 죄를 용서해주고 그들을 하늘 나라에서 성인들의 무리 안에 들게 해주시길 기도합니다.
정교회는 매번 신성한 리뚜르기아를 드릴 때마다 돌아가신 이들을 기도 안에서 기억합니다. 이밖에도 교회가 죽은 이들을 기억하는 추도예식이 있습니다. 전통에 따라 추도 예식은 죽은 지 3일째, 9일째, 40일째 되는 날에, 그리고 매년 안식한 날에 거행됩니다. 이런 계기 외에도 네 번의 “영혼 토요일”에 돌아가신 모든 신자들을 기억하며 추도 예식이 거행됩니다. 네 번의 영혼 토요일은 대사순절 직전 두 번의 토요일, 대사순절 첫 번째 토요일, 성령강림축일 직전 토요일입니다. 이밖에도 한국 정교회에서는 설날과 추석 등 조상들을 기리는 전통명절에도 추도예식을 거행합니다. 추도예식이 거행될 때, 고인의 가족들은 곡식들을 삶아 만드는 꼴리바라고 하는 음식을 성당에 가져와서 예식이 거행되는 신자석 중앙에 놓인 탁자 위에 올려놓습니다. 여기서 꼴리바는 부활을 상징합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부활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아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복음 12장 24절)
대성수식(아기아스모스)
정교회의 가장 오래되고 중요한 축일인 신현대축일은 그리스도께서 요르단 강에서 세례 받으실 때 일어났던 성 삼위 하느님의 현현을 기념합니다. 이 사건 안에 담겨진 풍부한 의미를 깨달은 정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세례 받으신 것은 단지 그분의 공생의 시작을 알려주고 성 삼위 하느님을 계시해준 사건일 뿐만 아니라 또한 온 피조세계가 그리스도의 구속의 영광을 나눠 갖도록 섭리되었다는 것을 드러내준다고 믿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세례 받으시기 위해 요르단 강에 들어가셨을 때, 두 가지 일이 일어났습니다. 먼저 그리스도께서는 구원하시러 오신 그 백성과 자신을 동일시하셨습니다. 그리고 물로 표상되는 피조세계 전체와 자신을 또한 동일시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자신의 세례를 통해서 피조 세계의 가치를 드러내셨고 그것을 창조주 하느님께로 정향시키셨습니다. 피조세계는 선하고 하느님께 속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대성수식은 신현대축일 전날과 당일 신성한 리뚜르기아에 이어 거행됩니다. 성수식은 우리 주님의 세례 사건과 성 삼위 하느님의 계시를 기념할 뿐만 아니라, 피조세계가 그리스도를 통해서 성화된다는 정교회의 신앙을 표현합니다. 성수식은 우리가 속해있는 인류와 피조세계가 하느님의 성화시키시는 현존으로 충만해지도록 창조되었다는 것을 확증합니다. 장엄한 성수식 후에는 성수를 신자들에게 나눠주어 신현대축일 기간 동안 집을 축복하는데 사용하게 합니다. 신자가 “신현축일 성수”를 마실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의 세례를 기억합니다. 교회가 한 개인, 혹은 어떤 사물, 혹은 사건을 성수로 축복할 때, 우리는 세례 받은 이들, 그들의 환경, 그들의 책임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성화되고 성령을 통해 성부의 나라로 옮겨진다는 것을 확신합니다.
대성수식에 더하여, 소성수식이 있는데, 이것은 언제든 거행될 수 있습니다. 보통 소성수식은 집을 축성할 때, 혹은 매달 첫날, 새 학년도의 시작, 새로운 과업의 시작 등을 계기로 하여 거행됩니다.
아르또끌라시아 축복식
다섯 개의 빵 축복식은 삶의 모든 은총에 대한 우리의 감사를 표현하는 간단한 감사 예식입니다. 기름, 포도주, 밀가루 그리고 빵이 예식이 사용되는데, 이것들은 삶에 가장 기초적으로 필요한 것들로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축복식은 그리스도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먹이신 사건을 우리에게 기억시켜줍니다. 이 축복식은 보통 만과 중간에 혹은 대축일과 특별한 경우에 신성한 리뚜르기아 후에 거행됩니다. 예식이 끝나면, 빵을 잘라 모든 회중들에게 나눠줍니다.
기립찬양(아까티스토스)
정교회는 오직 하느님께만 예배드립니다. 하지만 정교회는 또한 구원의 역사에서 하느님의 중요한 도구였던 특정한 사람들을 공경합니다. 그 중에서도 하느님의 어머니, 테오또꼬스 마리아는 가장 큰 공경을 받습니다. 정교회가 마리아를 크게 공경하는 것은 바로 그분이 성가가 노래하듯 하느님의 아들을 출산하시도록 선택받으셨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모성을 찬양하면서 우리는 당신을 영적인 성전, 테오또꼬스로 드높이나이다. 당신의 태에 머무신 분, 만물을 손에 쥐신 주님께서 당신을 거룩하게 하셨고, 당신을 영화롭게 하셨고, 모두에게 당신을 찬양하라고 가르쳐주셨기 때문이나이다. … ”
정교회가 테오또꼬스 마리아께 바치는 가장 아름다운 시가(詩歌)는 바로 성모기립찬양입니다. 이 예식의 명칭인 그리스 말 ‘아까티스토스’는 앉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한국어로는 기립찬양이라 부릅니다. 그러므로 회중은 마리아에 대한 공경과 그리스도 안에서 얻는 우리 구원에서 그분이 수행하신 고유하고 유일한 역할에 대한 감사로 인해, 예식 내내 일어서서 찬양합니다. 성모기립찬양은 대사순절의 네 번의 금요일에 네 부분으로 나뉘어 거행되고, 다섯 번째 금요일에는 전체가 거행됩니다.
성모기원의식(빠라끌리시스)
빠라끌리시스로 알려진 성모기원의식은 특별히 병들거나 시험을 당하거나 절망에 빠졌을 때 거행됩니다. 다양한 기도들을 통해 주님께 인도하심과 힘과 치유를 간청합니다. 많은 성가와 기도가 테오또꼬스 마리아께 바쳐지고 그녀의 도움을 간청합니다. 정교회는 우리 각자가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과 사랑의 연대로, 마리아와 성인들과 돌아가신 모든 신자들과 연합되어 있다고 믿습니다. 그러므로 이생에서 우리가 서로에게 기도해 달라고 요청하듯이, 우리는 하느님과 가장 가까운 인간존재이신 마리아에게도 우리를 위해 하느님께 기도해달라고 요청할 수 있다고 정교회는 믿습니다. 이 믿음이 아래의 성가에서 잘 표현됩니다.
“그리스도 신자들의 굳센 수호자, 창조주의 변함없는 중보자시여, 죄인들의 기원을 저버리지 마시고 당신의 선하심으로 빨리 오소서. 성모 마리아여, 믿음을 갖고 당신께 부르짖으며 찬미하는 우리를 길이 돌보기 위해 오사 중보하소서.”
성모기원의식에는 대기원의식과 소기원의식 두 가지 형태가 있습니다. 소기원의식은 훨씬 간결하여 대부분의 경우 이 기원의식을 거행합니다. 이 두 형태의 성모기원의식은 8월 15일 성모안식대축일 전 14일 동안 거행됩니다.
- 정교회의 가르침
정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세우시고 성령께서 인도하신 사도적 공동체와의 신앙과 사랑의 연속성을 세대를 거치면서 계속 지켜 왔습니다. 정교회는 정교회야말로 사도 시대로부터 이어오는, 오류와 왜곡에서 자유로운 역사적인 그리스도 신앙을 보존하고 가르쳐 왔다고 믿습니다. 또한 정교회의 가르침 안에는 진리와 반대되는 것, 하느님과의 참다운 연합을 방해하는 것은 조금도 없다고 믿습니다. 종종 동방 그리스도교를 특징짓는 고대성과 불변성은 정통 그리스도교 신앙에 충실하게 남아있으려는 정교회의 바램을 표현해줍니다.
그리스도교 신앙과 교회는 분리될 수 없다고 정교회는 믿습니다. 교회를 떠나서는 그리스도를 아는 것도, 성 삼위 하느님의 생명을 누리는 것도, 그리스도인이라 여겨지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바로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교 신앙이 선포되고 지탱되고, 교회를 통해서 한 개인은 신앙 안에서 양육되기 때문입니다.
계시
정교회에서는 모든 신앙의 원천이 하느님께 있습니다. 정교회는 하느님께서 자신을 우리에게 계시하셨다고 믿습니다. 특별히 우리가 하느님의 아들로 알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안에서 말입니다. 하느님의 이 계시, 그분의 사랑, 그분의 목표는 성령의 능력을 통해서 끊임없이 교회의 삶 안에 동시대적인 것으로 드러납니다.
정교회 신앙은 인간의 종교적 사색이나 이른바 하느님 존재의 ‘증명’에서 비롯된 것도, 신에 관한 인간의 질문에서 비롯된 것도 아닙니다. 정통 그리스도교(정교) 신앙의 기원은 하느님의 자기 계시입니다. 매일 교회에서 거행되는 조과는 “하느님 주께서 우리에게 나타나셨나니,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가 찬미 받으시도다.”라는 선포를 통해서 우리에게 이것을 확신시켜주고 되새겨줍니다. 하느님의 내적 존재는 항상 알려지지 않고 다가갈 수 없는 것으로 남아있지만, 하느님께서는 또한 자신을 우리에게 드러내셨습니다. 그리고 교회는 그분을 아버지로, 아들로, 성령으로 경험해왔습니다. 정교회 신앙의 중심에 있는 성 삼위 하느님 교리는 종교적 사색의 결과가 아니라 하느님에 대한 초월적 경험의 결과입니다. 교리는 오직 한 하느님이 계시고, 그 안에 구별되는 세 위격이 계신다고 가르칩니다. 달리 말하자면, 우리는 성부, 성자, 성령을 만날 때, 참으로 하느님과 접촉하는 경험을 합니다. 성 삼위 하느님은 결코 완전하게 이해될 수 없는 신비이지만, 정교회는 우리가 교회의 삶을 통해서, 특별히 감사의 성찬 예배와 성사들, 그리고 준성사 예식들을 거행함을 통해서, 성 삼위 하느님 안에 참으로 참여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육화
성 삼위 하느님에 대한 믿음과 더불어, 육화의 교리는 정교회의 가르침에서 중심 자리를 차지합니다. 정교회 신앙에 따르면, 예수는 경건한 사람이나 심오한 도덕적 스승 그 이상의 존재이십니다. 그분은 “사람의 아들이 되신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 육화 교리는 그리스도에 대한 교회의 체험을 표현합니다. 그분 안에서, 신성은 인성과 연합됩니다. 그 연합 안에서 이 두 실재는 그 어느 것도 파괴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부와 성령과 동일한 본질을 공유하시는 참 하느님이십니다. 게다가 그분은 인간적인 모든 것을 우리와 함께 공유하시는 참 인간이십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유일하신 하느님-인간으로서 인류가 하느님과 친교하도록 회복하셨다고 믿습니다.
성 삼위 하느님을 드러내시고, 인간의 참된 삶의 의미를 가르치시고, 자신의 부활을 통해서 죄와 죽음의 권세를 정복하신 그리스도께서는, 교회의 삶을 통하여 성령에 의해 모든 시대 모든 장소에 현존해오셨고, 이를 통해 자기 백성을 향하신 성부 하느님의 사랑의 최고의 표현이 되셨습니다. 교회의 위대한 교부들은 그리스도의 사역을 다음과 같은 대담한 주장으로 요약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그분과 같아지게 하시려고 우리와 같아지셨습니다.”
성경
성경은 정교회에서 매우 중요하고 고귀하게 여겨집니다. 성경의 중요성은 매일 매일의 예배와 예식에서 성경의 일부가 반드시 봉독된다는 사실에서 분명하게 표현됩니다. 성경의 수호자요 참된 해석자를 자처하는 정교회는 성경이 하느님 계시에 대한 가치 있는 증언들이라고 믿습니다. 구약성경은 고대 이스라엘에 주어진 하느님의 자기 계시를 표현하고 있는, 다양한 장르의 문학 형태로 된 49권의 책들의 모음입니다. 정교회는 구약성경을 그리스도의 오심을 준비하는 것으로 여기기에, 그것은 반드시 그리스도의 계시의 빛 아래서 읽혀져야 한다고 믿습니다.
신약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위격과 사역과 초기 교회 안에서의 성령의 충만한 강림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네 개의 복음경은 그리스도의 삶과 가르침, 특별히 그분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서술입니다. 21개의 사도들의 편지와 사도행전은 그리스도인의 삶과 신앙, 그리고 초기 교회의 발전을 다룹니다. 묵시록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고대하는 매우 상징적인 글입니다. 신약성경, 특별히 복음경은 정교 신앙에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 아들의 육화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위격 안에서 하느님의 완전한 계시가 이뤄졌음을 알려주는 ‘기록된 증언’이기 때문입니다.
전통
성경이 하느님 계시에 대한 가치 있는 기록물로서 중요하게 여겨지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그 계시 전체를 다 포함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은 하느님 백성의 계속된 삶 속에 주어진 하느님 계시의 한 가지 표현일 뿐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성경은 전통이라고 불리는 신앙의 보고의 일부입니다. 전통은 한 세대에서 다른 세대로 “전해져 온” 것을 의미합니다. 성경 안에 기록된 신앙의 증언에 더하여, 정통 그리스도교(정교) 신앙은 감사의 성찬 안에서 기념되고, 교부들에 의해 가르쳐지고, 성인들에 의해 영광을 받고, 기도와 성가와 성화(이콘) 안에 표현되고, 일곱 번의 세계 공의회를 통해서 수호되었고, 니케아 콘스탄티노플 신경 안에 요약되었고, 사회와의 관계 안에서 발현되고, 그리고 성령의 능력에 의해 정교회의 모든 지역 공동체 안에서 삶으로 구현됩니다. 성 삼위 하느님의 생명은 교회의 삶의 모든 측면에서 드러납니다. 마지막으로 교회는 그 전체로서 이 계시를 증언하는 참된 그리스도교 신앙의 수호자입니다.
공의회와 신경
하느님 계시를 교회의 삶의 어떤 한 차원으로 축소시키려는 그 모든 경향을 피했듯이, 교회는 또한 그 신앙에 대한 대대적이고 체계적인 정의를 피해왔습니다. 정교회는 그리스도교 신앙이 하느님과 인류의 자애롭고 신비로운 관계를 표현하고 가리킨다고 확신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어떤 새로운 철학이나 교의체계를 제정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무엇보다도 우리에게 성 삼위 하느님 안에 있는 “새 생명”을 주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위격 안에서 사람이 되셨습니다. 교회 안에서 분명하게 드러나는 이 현실은 어떤 언어나 어떤 공식이나 어떤 정의로 완전하게 포착될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신앙의 내용은 이성에 반대되지 않지만 종종 이성의 한계를 넘어섭니다. 삶의 주요한 진실들 중 많은 것들이 그러하듯 말입니다. 정교 신앙은 하느님의 존귀와 위엄의 초월성을, 인간 정신의 한계와 함께 인정합니다. 교회는 하느님에 대한 접근에 있어서 신비의 요소들을 인정하고 수용하는 것으로 만족합니다.
신앙의 근본적인 진리들이 거짓 가르침에 의해 심각하게 위협받을 때만, 교회는 어떤 신앙의 조항을 교리적으로 정의하기 위해 행동합니다. 이런 이유로 인해, 분열 이전의 고대 교회의 일곱 번의 세계 공의회의 결정들은 매우 높이 존중받습니다. 공의회은 참된 신앙을 정의하기 위해 그리스도교 세계 모든 곳의 주교들이 함께 모인 ‘주교회의(시노드)’입니다. 세계 공의회들은 새로운 교리들을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교회가 이미 이전부터 믿어오고 가르쳐왔던 것을 특정한 장소와 시대에 선포했던 것입니다.
325년 니케아 공의회와 381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작성되고 선언된 니케아 콘스탄티노플 신경은 그 후로 정교회의 근본적인 신앙의 가장 권위 있는 표현으로 인정되어 왔습니다. 신경은 종종 “신앙의 상징”(Symbol of Faith)이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상징’이라는 표현은 신경이 어떤 분석적인 글이 아니라, 신경보다 더욱 위대한 어떤 현실을 가리키고 있으며 신경은 단지 그것에 대한 미약한 증언일 뿐이라는 것을 지시합니다. 그 후 계속해서, 신경은 정통 신앙의 척도, 그리스도교 교육의 기초가 되어 왔습니다. 신경은 세례 성사 때 그리고 신성한 리뚜르기아가 거행될 때 큰소리로 고백됩니다.
니케아 콘스탄티노플 신조
-. 한 분이신 하느님 아버지, 전능하시고 하늘과 땅과 유형무형한 만물의 창조주이신 하느님을 믿나이다.
-. 그리고 또 오직 한 분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모든 세대에 앞서 성부로부터 나신 하느님의 외아들이시며 빛으로부터 나신 빛이시요, 참 하느님으로부터 나신 참 하느님으로서 창조되지 않고 나시어, 성부와 일체이시며 만물이 다 이분으로 말미암아 창조되었음을 믿나이다.
-. 우리 인간을 위하여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하늘에서 내려 오셔서 성령으로 또 동정녀 마리아께 혈육을 취하시고 사람이 되심을 믿으며,
-. 본디오 빌라도 시대에 우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묻히심을 믿으며,
-. 성경 말씀대로 사흘 만에 부활하시고,
-. 하늘에 올라 성부 오른편에 앉아 계시며,
-.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러 영광 속에 다시 오시리라 믿나니 그의 나라는 끝이 없으리이다.
-. 그리고 주님이시며 생명을 주시는 성령을 믿나니, 성령은 성부로부터 나오시며 성부와 성자와 더불어 같은 흠숭과 같은 영광을 받으시며 예언자를 통하여 말씀하셨나이다.
-. 하나인 거룩하고 보편되고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를 믿나이다.
-. 죄를 사하는 하나의 세례를 알고 믿나이다.
-. 죽은 이들의 부활과 후세의 영생을 굳게 믿고 기다리나이다. 아멘
- 영성
정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합니다. 복음이라는 말은 그리스어로 “에방겔리온(Evangelion)”인데, 이 단어는 문자적으로는 “기쁜(좋은) 소식”을 의미합니다. 정통 그리스도교(정교)의 기쁜 소식은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경계 없고 희생적인 사랑의 선언이요, 인간 존재의 참된 운명에 대한 계시입니다. 복음(기쁜 소식)에 대해 사색하면서, 4세기 니싸의 그레고리오스 성인은 이렇게 썼습니다. “기쁜 소식은 인간이 더 이상 하느님의 나라에서 추방되고 버림받은 존재가 아니라 다시 아들, 하느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나누길 원하시는 최고의 보물은 바로 그분 자신의 생명이라고 정교회는 믿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하느님께서 역사 속에서 행동하시고, 우리가 그분의 사랑과 선에 참여하고 하느님 나라의 시민들이 되도록 허락하셨다는 확신과 함께 시작합니다. 이 확신은 리뚜르기아의 기도문에서 너무 아름답게 표현됩니다. “당신은 우리를 하늘에 이르게 하시고 다가올 나라에 합당한 사람이 되게 하시기까지 멈추지 않고 모든 일을 행하셨습니다.”
성부 하느님의 사랑의 주도성은 예수 그리스도의 위격과 사역 안에서 완전하게 표현되고 구현되었습니다. 하느님 아들의 육화의 전체 목적은 인류를 하느님과의 친교로 회복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정교회의 대 스승들과 교부들은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그분과 같이 되게 하시려고 우리와 같이 되셨습니다.”라는 선언을 통해서 이 확신을 끊임없이 재확인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빛, 우리의 생명으로 찬양되십니다. 그분의 위격 안에는 인성과 신성의 연합이 있고, 우리는 그 연합을 나눠 갖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그분의 삶의 방식 안에는 우리가 좇아가도록 초대된 참된 삶의 모델이 있습니다. 그분의 승리의 부활에는 우리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모든 권세들로부터의 해방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성부 하느님은 우리를 되찾으시고, 우리에게 다시 그분의 아들딸들이 되라고 부르셨습니다.
신화
인간의 근본적인 소명과 목표는 하느님의 생명을 나눠 갖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과의 친교 안에서 살도록 하느님에 의해 창조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위격 안에서 강생하신 사건은 인간으로 하여금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다시 성부께로 올라갈 수 있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정교회는 그리스도인들 각자가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는 운동에 속해있다고 믿습니다. 그 운동이 바로 테오시스 즉 신화(deification)입니다.
테오시스는 각 사람이 좀 더 완벽해지고, 좀 더 거룩해지고, 좀 더 하느님과 연합되어가는 영적인 순례여정을 표현합니다. 그것은 결코 정지된 상태가 아닙니다. 또 죽음 이후에만 일어나는 것도 아닙니다. 반대로 모든 그리스도인들 각자에게, 테오시스는 세례와 함께 시작되고, 내생뿐만 아니라 이생 전체를 통해 지속되는 하느님을 향한 사랑의 운동입니다. 구원은 죄와 죽음과 악으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합니다. 구속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되사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정교에서 구원과 구속은 신화(테오시스)의 맥락 안에 있습니다. 그리스도교적 삶에 대한 이 같은 풍부한 전망은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성 베드로가 그의 두 번째 서신의 서두에서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는 자가 되라”고 한 권면에 아주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또한 인간은 신이 되라는 명령을 받은 피조물이라는 성 대 바실리오스의 말을 통해서도 그것은 강력하게 표현되고 있습니다.
분명 이것은 올바르게 이해되어야 하는 대담한 주장입니다. 정교회는 테오시스를 언제나 숨겨져 있고 알려지지 않는 하느님의 본질이 아니라 하느님의 에너지와의 연합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교회의 경험은 이것이 하느님과의 참된 연합임을 증명해줍니다. 그것은 결코 범신론적이 연합이 아닙니다. 이 연합 안에서 신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은 여전히 그 고유의 특징들을 보전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정교회는 인간의 삶은 오직 그것이 신적인 것이 될 때 그 완성과 충만에 도달함을 믿습니다.
성령
그리스도인과 하느님의 점점 깊어지는 연합은 어떤 마술적이고 자동적인 과정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단번에 모두를 위해 죄와 죽음과 악의 권세를 멸하셨지만, 이 승리는 또한 성령에 협력함을 통해서 각자에 의해 자신의 것이 되어야만 합니다. 각 사람은 바로 성부 하느님과의 친교 안에서 인간의 삶의 충만을 실현하기 위해, 생명을 주시고 자유케 하시는 성령과 동역하도록 부름 받습니다. 성령께서는 신화의 동인으로서 우리를 성 삼위 하느님의 생명 안에 결합시키십니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또한 우리 각자가 창조될 때 우리 안에 주어진 “하느님의 형상과 닮음”을 완전케 함에 있어서, 언제나 우리 인간의 자유를 인정하시고 우리의 능동적인 협력을 요구하십니다.
우리가 성 삼위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하는 것, 즉 우리의 신화는 교회 안에서 일어납니다. 정교 신자에게, 교회는 하느님과 그분의 백성의 만남이 일어나는 장소입니다. 성령과 교회는 유기적으로 결부되어 있습니다. 2세기, 성 이레네오스는 “교회가 있는 곳에 성령이 있고, 성령이 있는 곳에 교회가 있습니다.”라는 말로 이것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주었습니다. 성령께서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공통 본성을 계시하기 위해, 또 우리를 성부 하느님과 연합시키시기 위해 교회의 삶을 통해 일하십니다. 우리는 감사의 성찬 예배의 거행과 영성체를 통해서, 성사들에 참여함을 통해서, 매일 기도 규칙을 준수함을 통해서, 금식의 실천을 통해서, 그리고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삶에 필요한 모든 것들을 통해서 성령을 얻습니다.
주님이시며 생명의 수여자로 영광 받으시는 성령께서는, 우리의 삶을 완전에 이르게 하시기 위해, 또 우리를 책임 있고 사랑하는 인간 존재로 만드시기 위해, 교회의 삶 안에 현현하십니다. 예배의 열매는 성령의 선물(은사)들입니다. 사도 바울로는 갈라디아서에서 성령의 선물들을 이렇게 열거합니다. “사랑, 기쁨, 평화, 인내, 친절, 선행, 진실, 온유, 절제.” 분명 이것은 그리스도교적 삶의 덕들입니다. 이것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분리할 수 없는 것임을 증명해줍니다.
개인과 교회
테오시스는 그 자신을 우리와 나누고자 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증거할 뿐만 아니라 인간 존재에 대한 매우 긍정적인 관점을 표현합니다. 각 사람은 하느님과의 고유한 관계를 맺도록 해주는 아주 중요하고도 천부적인 자질과 능력을 가진다고 정교회는 믿습니다. 인간은 결코 전적으로 타락한 존재로 여겨지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형상”은 죄로 인해 왜곡될 수는 있을지언정 완전히 제거될 수는 없습니다. 교회의 삶을 통해서 성취의 기회는 언제나 존재합니다. 성사들은 언제나 각 개인을 이름으로 부르며 거행됩니다. 이 행위는 단지 우리에게 각 개인의 존엄성을 일깨워줄 뿐만 아니라 또한 각 개인이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져야 하는 책임성을 강조합니다.
정교회가 인간의 가치를 승인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고립된 존재 혹은 자족적인 존재로 창조되었다고 믿지는 않습니다. 각 개인은 교회의 중요한 구성원이 되도록 부름 받습니다. 정교회는 교회의 한 부분으로 참여하지 않고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고 믿습니다. 신화의 과정 또한 공동체적인 삶의 맥락 안에서 전개됩니다.
교회 안에서 하느님과 연합되는 것은 우리 각자의 고유한 인격이 제거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비인격적인 힘이나 권세에 사로잡히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참되고 가치 있는 모든 사랑이 그렇듯이, 우리 각자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의 인격을 존중하십니다. 그분의 사랑은 파괴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 자신의 참된 자아를 드러내고 발전시키고 완전하게 하십니다. 하느님의 생명에 들어감으로써, 우리는 본래 하느님께서 의도하신 바의 인간 존재가 됩니다.
- 정교회의 역사
교회는 어떤 성현이나 집단 혹은 어떤 행위 규범이나 종교 철학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에게서 비롯됩니다. 정교회는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세워졌고, 성령에 의해 생동하게 되었던 사도 공동체에 기원을 둔다고 믿습니다. 부활 대축일 후 50일째 되는 날 경축되는 오순절 성령강림대축일은 성령께서 사도들 위에 충만하게 임하시어, 비로소 세상을 향한 교회의 사역이 시작된 사건을 기념합니다. 정교회는 정교회야말로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을 통해 태어난 그리스도의 교회와 사랑과 믿음과 직제에 있어서 직접적이고 깨어지지 않은 연속성을 보존해 왔다고 믿습니다.
박해시대
사도행전과 사도 서신들에 묘사된 최초의 교회는 자신을 유대 땅의 경계 안에 가두지 않았습니다. 교회는 온 세상에 나가서 복음을 전파하라는 우리 주님의 명령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그리스도의 말씀과 그분의 구원을 가져오는 죽음과 부활의 사건은 단지 1세기 지중해 세계에 속해있던 사람들뿐만 아니라 모든 지역 모든 시대의 사람들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부활 이후 불과 몇 년 만에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로마 제국의 모든 주요 도시로 퍼져나갔습니다.
초기 교회가 유대교와 이교로부터 많은 개종자를 받아들였던 반면, 복음이 선포된 세상은 성 바울로의 말처럼 “비정하고 무자비한” 세상이었습니다. 몇 번의 아주 짧은 평화의 시기를 제외하고 교회는 첫 3세기 동안 로마 제국 전체에서 끊임없이 박해를 받았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보여준 신앙과 사랑은 로마제국의 종교와 정치체제에 큰 위협으로 간주되었습니다. 수 백만의 그리스도인들이 순교를 당했습니다.
성장의 시대
4세기 초는 교회의 발전에 새로운 국면을 열어주었습니다. 로마 제국 황제들의 주도로 자행된 악랄한 박해의 세기들 끝에, 로마의 한 황제 콘스탄티노스 대제가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그는 313년에 그리스도교에 신앙의 자유를 허용했습니다. 이 칙령은 교회가 박해에서 살아남았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제국에서 아주 중요한 힘이 되었다는 사실에 대한 인정이었습니다. 그 후 계속해서 교회와 제국은 서로 매우 밀접하고 유익한 관계를 맺기 시작했습니다. 교회는 제국의 지원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구 로마 제국을 특징지었던 악습들 또한 그리스도교 비잔틴 시대에 와서 엄청나게 축소되었습니다. 교회는 정말 교회가 속해있던 사회의 누룩이었습니다. 4세기에서 10세기까지의 기간은 교회의 내적인 발전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시기였습니다. 신약성경의 권위 있는 표준이 결정되었고, 예배는 뼈대와 구조를 갖추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교의 가르침들은 교회의 “아버지들(교부들)”이라고 알려진 위대한 목자들과 신학자들에 의해 발전되었습니다. 이 시기는 또한 강력한 선교의 시기였습니다. 그중 제일 중요한 것은 성 끼릴로스와 성 메토디오스에 의해 슬라브족이 복음화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시기라고 해서 투쟁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비잔틴 제국은 이웃하고 있는 페르시아와 이슬람 세력에 맞서 늘 경계해야만 했습니다. 내적으로도 교회는 많은 중대한 분열과 이단들로 인해 고통을 받았습니다. 예를 들어 431년과 451년에 중대한 분열이 일어났습니다. 가장 중요한 이단 중에는 아리오스주의가 있었습니다. 이 이단은 그리스도께서 참된 하느님이 아니었다고 가르쳤습니다. 이 이단은 교회를 크게 괴롭혔고 거의 한 세기 동안 제국 전체에 큰 혼란을 가져왔습니다.
교회의 근본적인 교리는 일곱 번의 세계 공의회에 의해 선언되었고 수호되었습니다. 열렸던 지역의 이름들이 붙어있는 이 주교회의(시노드)들은 육화와 성 삼위 하느님에 대한 올바른 가르침들을 확증하기 위해서 세계 각처에서 모여든 주교들을 포함했습니다. 공의회들은 새로운 교리들을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교회가 언제나 믿어오고 가르쳐왔던 것을 특별한 장소와 시대 상황 속에서 특별한 방식으로 선언했던 것입니다. 초기 교회의 세계 공의회들과 다른 여러 시노드들을 통해서 드러난 교회적 삶의 공의회적이고 협의적인 표현들은 계속해서 정통 그리스도교(정교)의 중요한 특징을 이루어 왔습니다.
세계 공의회들은 또한 로마, 콘스탄티노플,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그리고 예루살렘이라는 다섯 개의 중심을 가진 교회의 구조를 승인했습니다. 이 도시들의 대주교들은 총대주교로 인정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특정 지역을 아우르는 지역 공의회(시노드)를 주재합니다. 초기 교회는 한 가지 색깔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각 중심들은 고유한 신학 유형들, 관습들 그리고 예배 전통들을 가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교회는 신앙의 통일성을 공유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초기 시대부터, 제국의 수도였던 로마의 주교에게는 영예의 수위권이 부여되었습니다. 2차 세계 공의회(381)는 “콘스탄티노플의 주교는 로마의 주교 다음으로 영예의 특권들을 소유한다. 콘스탄티노플은 새 로마이기 때문이다.”라고 선언함으로써 콘스탄티노플 주교에게도 영예로운 지위를 부여했습니다.
대분열
대분열은 서방 로마 가톨릭 교회와 동방 정교회 간의 분열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이 대분열은 11세기에 일어났습니다. 동방과 서방이라는 두 위대한 전통의 관계는 4세기부터 자주 삐걱거려 왔습니다. 하지만 신학적 표현과 전례적 관습 그리고 권위의 관점에 있어서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통일성과 조화는 유지되었습니다. 하지만 9세기 경, 정치적 환경, 문화적 균열, 교황의 요구와 주장 그리고 서방 교회에서 니케아 신조에 ‘필리오쿠에(Filioque)’를 삽입한 것 등으로 인해서 차이는 점차 더욱 강화되었습니다. 필리오쿠에는 성령이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나온다고 주장합니다. 교황의 법적 수위권 주장과 필리오쿠에는 동방에 의해 강력하게 거부되었습니다.
분열의 정확한 연대를 확정하는 것은 매우 어렵지만, 1054년 상호 파문장이 교환되었습니다. 십자군 전쟁, 특별히 1204년 서방 십자군에 의해 자행된 콘스탄티노플 약탈 사태는 두 전통이 소원해지고 불신해가는 과정에서 최종적인 요소로 여겨질 수 있습니다.
그 시기 이후로 로마의 교황을 중심으로 한 서방 교회와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를 중심으로 한 동방 교회는 서로 갈라져 각자 다른 길을 가게 되었습니다. 1274년과 1439년 일치를 회복하기 위한 시도들이 있었지만, 더 이상 일치를 회복할 수 없었습니다. 정치적, 문화적, 정서적 요소들이 언제나 개입되어 있지만, 정교회는 계속된 분열의 두 가지 주요 원인은 교회론에 있어서 교황의 보편적 관할권과 무오류성 주장 그리고 서방 교회에 의해 니케아 신경에 삽입된 ‘필리오쿠에’가 함축하고 있는 교리적 신학적 문제라고 믿습니다.
그 후 거의 500백 년 동안 이 두 전통은 서로 고립된 채 살아왔습니다. 다만 1960년대 초부터 깨어진 일치를 회복하고자 하는 발걸음이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1965년 총대주교 아테나고라스와 교황 바오로 6세가 서로 파문을 취소한 것은 가장 의미 있는 사건입니다.
투쟁의 시대
1453년 콘스탄티노플은 이슬람 세력의 침공으로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수도의 함락과 함께 비잔틴 제국도 종말을 고했습니다. 광대한 소아시아 대륙은 비그리스도인들의 수중에 떨어졌습니다. 이미 그 이전 세기에 이슬람의 정치적 지배를 받게 된 그리스도교의 위대한 중심지들,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예루살렘에 이어 이제는 콘스탄티노플마저도 같은 신세가 되었습니다. 오토만 제국의 지배 아래서 그리스도인들은 2등 시민으로 취급되었고, 그래서 더욱 무거운 세금을 지불하고, 의복도 구별되게 입어야만 했습니다. 발칸 지역과 소아시아에서 정교회의 삶은 강압과 압제 속에서도 계속되었습니다. 수천 명의 그리스도인들이 순교를 당했고, 총대주교들은 파면되고 살해되었습니다. 성당들과 수도원들, 그리고 학교들은 폐쇄되었고 파괴되었습니다. 1821년 그리스의 해방과 함께 잔혹한 몇 가지 관습은 끝났습니다. 하지만 20세기 초까지도 일련의 사악한 대학살이 자행되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까지도 소아시아에서 그리스도인들은 기본적인 인권조차도 부정당하고 있습니다.
비잔틴 제국의 멸망 이후 러시아 교회는 거의 500년 동안 번영을 누렸습니다. 하지만 1917년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나자 정교회는 전투적인 무신론자들의 신념과 정치 체제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대부분의 성당은 폐쇄되었고, 10세기 이후 정교회에 깊이 물든 땅 러시아에서 그리스도교를 제거해버리기 위한 정책이 개시되었습니다. 두 번의 세계 대전 사이에 러시아의 정교회 그리스도인들은 극도의 잔인하고 파괴적인 박해로 고통을 받았습니다. 1943년이 되어서야 겨우 일정한 수준에서 교회를 허용하는 정부 정책의 변화가 있었습니다.
오늘날, 옛적 동방 그리스도교의 자긍심과 영광이 넘쳤던 땅의 많은 곳에서, 정교회는 수많은 난관과 박해 속에서 투쟁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최근의 몇 세기 동안에 초기 교회 박해 시기보다 더욱 많은 순교자들이 생겨났습니다. 하지만 불의와 모욕에도 불구하고, 신앙은 살아남습니다.
부흥과 화해의 시대
20세기 초부터 정교회는 에큐메니칼 운동(교회 일치 운동)에 헌신해 왔습니다. 그리스도교의 일치를 위한 이 같은 행동은 초기 교회 시대 이래로 분열에 대한 가장 대담한 반응입니다.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청은 1920년의 회칙을 통해서 일치를 위한 운동에 강력한 영감을 불어넣었을 뿐만 아니라 1948년 세계교회협의회(WCC) 창설에 주요한 주체로 참여했습니다. 그리스도교의 일치 문제는 영원히 기억되실 아테나고라스 총대주교의 특별한 관심사였습니다. 그는 로마 가톨릭 교회와의 참된 대화를 시작하기 위해, 그리고 다양한 정교회 안에서 형제적 친교의 감각들을 새롭게 하고 진작시키기 위해 무던히 애를 쓰셨습니다. 1968년 총대주교는 미래를 내다보고 “자비로우신 주님께서 가능한 한 빨리 우리의 거룩한 동방과 서방 교회들에게 다시 함께 신성한 리뚜르기아를 거행하고 함께 친교하는 은총을 주실 것”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 교회
정교회의 삶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계속 이어가고 완성합니다. 그리스도와 그분의 교회의 밀접한 결합은 그리스도는 머리요 교회는 그분의 몸, 그리스도는 신랑이요 교회는 그분의 신부라고 선언하는 성경 구절 안에 분명하게 형상화되어 있습니다. 이 형상들은 교회가 그리스도와 무관하게 실존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하게 표현합니다.
거의 이천년 전 갈릴래아에서 첫 제자들에게 나타나시고, 사랑받으시고, 추종되시었던 구세주는 그 후 그분의 교회를 통하여 알려지시고, 사랑받으시고, 추종되시는 동일한 구세주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성 삼위 하느님을 계시하셨기 때문에, 그분의 교회도 계속해서 거룩한 성 삼위 하느님을 드러내고 예배 안에서 그 하느님께 기도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인류를 아버지 하느님과 화해시키셨기 때문에, 그분의 교회도 계속해서 말씀과 행동으로 온 세상에서 화해의 매개가 됩니다.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참된 삶의 소명을 밝히 드러내주셨기에, 그분의 교회도 계속해서 우리 각자 안에 있는 하느님의 형상과 닮음이 완성에 이르게 해주는 장이 됩니다.
정교회 그리스도인은 세례에서 그리스도와 연합되고, 매번의 감사의 성찬 예배에서 그리스도로 양식을 공급받습니다. 우리는 성령께서 교회 안에서 그리고 교회를 통하여 일하심으로써, 그리스도를 우리의 주님이 되게 하시고 그분의 사역을 완성에 이르게 하신다고 믿습니다.
정교회는 교회에 대한 자신의 관점을 축소 환원시키려는 모든 시도들을 거부해 왔습니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요 성령의 전이라고 말하는 성경의 표현은 교회가 많은 제도들 중 하나로, 혹은 하나의 사회 구제 조직으로, 혹은 민족적 형제적 친교 단체로 생각하는 것 이상의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분명 교회는 제도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고, 언제나 교회를 구성하는 사람들의 죄와 한계성에 종속되어 있습니다. 그렇지만 정교회는 교회가 인간적 차원과 더불어 분명 신적인 차원을 가지고 있다고 믿습니다. 교회를 표현하는 그리스어 ‘에클레시아’는 특별한 목적을 위해 하느님께서 불러 모으신 공동체를 함축합니다. 이것은 교회가 하느님과 그분의 백성이 만나는 유일한 장으로 묘사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개인적 체험
정교회 밖에 있는 개인은 정교 신앙을 온전하게 이해하거나 소유할 수 없습니다. 교회를 떠나 각자의 개인적인 관점에서 보면 정교회는 수많은 세계관 중 하나로, 하나의 문화적 부수물로, 기껏해야 형식적 교회로 잘못 보일 수 있습니다. 신적인 삶의 계시로서 정교신앙을 경험하게 해주는 필수적인 관점은 오직 교회 안으로부터의 관점입니다.
정교 그리스도인이 되는 과정
정교회는 보편적인 소명과 부르심을 가집니다. 정교회는 그 구성원을 어떤 특정한 문화, 종족, 계층, 분파의 사람들에게 제한하지 않습니다. 정말로 정교회는 문화, 민족, 언어의 다양성을 교회의 한 부분으로 가치 있게 여깁니다. 정교회는 또한 모든 인간적 장벽들을 초월하는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과 사랑의 통일성을 주창합니다. 정교회의 구성원이 되는 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열려있습니다.
만약 정교회의 구성원이 되는 것에 진지하게 관심이 있다면, 지역의 정교회 사제를 만나야 하고, 성당 공동체와 익숙해져야 합니다. 사제는 친절하게 안내하고 조언해 줄 뿐만 아니라 적절한 때가 되면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받아들일 것입니다. 이것은 새로운 영적 가족을 갖게 됨을 의미합니다.
사제는 정교회에 입문하고자 하는 이들을 위해 특별한 신앙 강좌나 교육을 제공할 것입니다. 이 교육의 기간과 내용은 그리스도교 신앙에 대한 이전의 경험과 교육에 따라, 그리고 각자의 특별한 필요와 관심에 따라 결정되고 진행될 것입니다.
일정한 교육 기간을 거치면, 교회로의 입문 예식이 행해집니다. 만약 그리스도교가 아닌 종교 출신이라면 신앙 고백을 하고 세례 성사와 견진 성사를 받아야 합니다. 만약 가톨릭 교회와 같이 정교회와 유사한 신앙을 가진 교회 출신으로서 합당하게 세례 받고 견진도 받았다면, 정교회와의 화해를 의미하는 간단한 도유식을 거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야 거룩한 영성체를 누릴 수 있는데, 감사의 성찬 예배를 함께 나누는 것은 언제나 교회와의 연합의 완성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 위탁
정교 그리스도인의 최종적인 의탁은 교회 안에서 그리고 교회를 통해서 알려지시는 우리 주 그리스도께로의 의탁입니다. 이것은 “우리 자신과 서로를 그리고 우리의 온 생명을 우리 하느님 그리스도께 맡깁시다”라고 초대하는 교회의 연도 안에 분명하게 표현됩니다. 거룩한 성체성혈을 받아 모시기 전에 우리는 “인류를 사랑하시는 주여, 당신께 우리의 온 생명과 희망을 맡기나이다.”라고 기도합니다. 우리 각자는 유일한 존재이고, 그래서 성령에 의해 삶 속에서 각기 다른 다양한 은사들과 소명으로 강복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께 자신을 맡기는 것은 다양하게 표현될 것입니다. 하지만 정교회는 이 의탁이 언제나 하느님을 예배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으로 드러나고 성취된다는 것을 굳게 믿습니다. 예배는 교회의 삶의 중심입니다. 예배, 개인적 기도, 특별히 거룩한 감사의 성찬 예배에 참여하는 것은 정교 그리스도인 각자의 삶에 있어서 가장 중심이 되는 일입니다. 이러한 행위들을 통해서 우리는 점점 더 하느님과 가까워지고 성령의 은사들로 강복되고, 이를 통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웃을 사랑하고 책임 있게 섬길 수 있게 됩니다. 정교회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떼어놓으려는 그 어떤 시도도 거부합니다. 이 둘은 떨어질 수 없습니다. 이 확신은 신성한 리뚜르기아를 거행할 때 사제와 회중이 번갈아 가며 “서로 한 마음으로 사랑하며 고백합시다.” “일체이시고 나뉘지 아니하시는 성부 성자 성령, 성 삼위 하느님을 믿나이다.”라고 말하는 것을 통해 표현됩니다.
비록 정교회가 예배의 가치를 높이 평가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교회가 복음에 따라 사는 일상적 삶의 중요성을 과소평가하는 것은 아닙니다. 신성한 리뚜르기아가 우리에게 상기시켜 주듯이, 오직 믿음과 사랑을 가진 사람만이 거룩한 영성체를 향해 나아갈 수 있습니다. 주님의 몸과 피에 우리가 참여하는 것은 또한 우리 각자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품은 자,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자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해 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