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오늘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은 의료과학이 엄청난 진보를 이뤄가고 있다는 사실에 민감합니다. 질병들은 놀라운 컴퓨터화된 진단 장치, 특수한 기술, 새로운 약물 처치법 등에 의해 다루어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일반인들은 이제 의학과 연계된 문제가 제기될 때마다 엄청난 양의 선택 가능성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지난 시대, 교회에서 의사는 언제나 존경스러운 직업으로 간주되었습니다. 정교회 전통 안에서 가장 사랑을 받아온 몇 사람은 하느님에 대한 믿음과 치료 사역의 실행을 결합시켰습니다. 복음사도 루카는 의사였습니다. 그의 복음서와 사도행전은 보통 이상으로 의약 용어들과 의료적 상황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형제 의사였던 성 코즈마와 성 다미아노스, 그리고 성 판델레이몬은 정교회에서 폭넓게 공경받고 있는 의사 성인들의 주된 예들입니다. 정교회 역사의 비잔틴 시기에는 제단의 거룩한 직무와 병자를 치료하는 의사의 직업을 결합시켰던 많은 사제-의사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어떤 경우에도 부적절한 결합이 아니었습니다. 우리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치유하는 사역에 많은 힘을 쓰셨기 때문입니다. 네 개의 복음서는 사람의 육체적 건강에 대한 그리스도의 관심을 반복적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질병을 치료받기 위해 예수님을 찾아온 사람들의 이야기도 자주 언급되고 있습니다.
사람과 하느님의 협력
결과적으로 교회는 항상 치유과정의 두 차원을 인정해왔습니다. 한편으로 우리의 생명 전체는 하느님의 손에 달려있다는 깨달음이 있습니다. 육체와 영혼을 가진 우리는 그분의 피조물이고, 그렇기 때문에 육체에 관한 것이건, 감정과 정신에 관한 것이건, 우리는 병들었을 때 하느님을 향해야 합니다. 정교회의 기도서에 분명히 피력되고 있듯이, 일차적이고 근본적인 차원에서 하느님만이 영혼과 육체의 치유자이십니다. 정교회에서 우리는 사제가 드리는 “병자들을 위한 기도”를 통하여 질병의 치유를 위해 기도할 뿐만 아니라, 교회는 성유 성사를 통해서 신자들에게 하느님의 치유를 제공해 왔습니다. 다른 교회들과는 달리, 성유 성사에 대한 우리 정교회의 이해는 항상 성경의 말씀을 액면 그대로 가치 있는 것으로 진지하게 여깁니다.
“여러분 가운데 고난을 당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은 기도를 해야 합니다. 마음이 기쁜 사람은 찬양의 노래를 부르십시오. 여러분 가운데 앓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은 교회의 원로들을 청하십시오. 원로들은 주님의 이름으로 그에게 기름을 바르고 그를 위하여 기도해 주어야 합니다. 믿고 구하는 기도는 앓는 사람을 낫게 할 것이며 주님께서 그를 일으켜주실 것입니다. 또 그가 지은 죄가 있으면 그 죄도 용서를 받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서로 죄를 고백하고 서로 남을 위하여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모두 온전해질 것입니다. 올바른 사람의 간구는 큰 효과를 나타냅니다.”(야고보서 5:13-16)
하지만 하느님의 치유 권능을 강조하는 것은 치유에 있어서 인간의 노력을 격하시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의학적 치료 또한 하느님의 치유 목표에 인간이 협력하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사실 정교회의 모든 가르침은 투쟁하고 하느님의 뜻에 협력하는 인간의 노력에 큰 의의를 둡니다. ‘신에르기아(συνεργια)’라는 용어로 표현되는, 이 믿음은 구원과 영적 성장과 도덕적 행위와 인간의 잠재성의 성취를 위해, 또 우리의 공동체적이고 사회적 삶과 관련된 모든 일에서 하느님의 뜻이 이뤄지게 하기 위해, 인간의 재능과 능력을 사용할 것을 요구합니다. 그래서 원칙적으로 치료, 의사, 식이조절요법, 외과적 수술까지도 교회 역사 속에서 일반적으로 인간의 질병을 치유함에 있어서 하느님과 협력하는 필요하고 적절하며 바람직한 방식으로 이해되어 왔습니다.
새로운 방법들, 새로운 선택들, 새로운 문제들
하지만 최근에는 의학에서 이런 오래된 협력의 관점에 문제를 일으키는 몇 가지 현상들이 일어났습니다. 일반적인 가정은 더 이상 옛날처럼 확고하지 않습니다. 부분적으로 이것은 생물학적 지식의 진보가 기존의 질병을 치료할 뿐만 아니라 또한 인간의 육체와 정신의 자연적 과정들을 조작하고 변화시키는 현재적 잠재적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기인합니다. 피임약과 향정신성 마약 등이 그 예입니다. 이런 신기술들은 교회에 새로운 문제를 던집니다. 환자를 정상적인 상태로 회복시키기 위해 의료적 처지를 사용하는 것과 지속적인 의학적 개입을 통해 환자의 생리적 심리적 상태를 지속적으로 바꾸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하지만 여기까지만 해도 교회는 그리 크게 반대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개인들에게 이익이 됨을 보아왔고, 대체로 그것들로 인해 하느님께 감사드려왔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 발전들은 계속되었고 이제 모든 새로운 발견은 선한 것이라는 가정 하에 실험실로부터 나오는 것이면 무엇이든 다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할 수만은 없게 만드는, 그런 선을 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새로운 태도는 단지 의료윤리의 문제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모든 과학적 기술적 발전을 바라보는 현시대적 태도 안에서 발견됩니다. 우리는 이전에는 ‘진보’의 이름으로 행해진 이러한 발전들을 인간이 성취할 수 있는 선의 가장 두드러진 예들로서 수용해왔습니다. 하지만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된 이래로, 우리는 우리의 ‘진보’가 항상 가격표를 가져오는 것임을 점점 더 발견해가고 있습니다. 과학적 기술적 진보의 모든 단계들은 선한 방향과 악한 방향 두 가지로 우리의 삶에 영향을 줍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환경과 건강이라는 관점 아래서, 또한 인간 삶의 윤리적이고 영적인 질에 미치는 결과라는 관점에서, 이 진보의 비용을 계산해 보아야 한다는 것을 알아가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우리의 모든 과학적 지식의 적용이 선하다는 것에 대한 우리의 오래된 믿음은 바뀌었습니다. 과거에는 모든 기술적 발전이 ‘좋은’ 것이었습니다. 지금은 점점 더 많은 이들이 이것을 의심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기술적으로 뭔가를 할 수 있다고 해도, 그것이 자동적으로 필연적으로 그 뭔가를 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의학에서 DNA의 유전자 코드에 대한 발견으로부터 초래된 유전자 조작과 유전자 실험의 예고된 가능성은 양식있는 과학자들로 하여금 인류에게 미칠 잠재적 해악을 가늠해보게 했고, 인간의 염색체 유전을 가지고 행해지는 이런 실험이 배격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게 만들었습니다.
어떤 경우이든, 우리 모두는 의학의 영역에서 의료과정에 대한 수많은 선택에 직면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제 선천적인 질병은 태아가 어머니의 자궁 안에 있을 동안에 존재하는 것으로 규정될 수 있습니다. 법은 낙태를 허용합니다. 그렇게 해서 낙태할 것이냐 말것이냐 라는 선택적 대안에 부모는 직면합니다. 이것은 의료기술이 최근에 와서야 가능하게 한 새로운 종류의 질문입니다. 다른 예를 봅시다. 한 친척이 당신에게 신장을 제공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신장 이식이 가능해졌기 때문입니다. 일련의 질문들을 보십시오. 먼저 한 사람에게서 다른 사람에게로 장기를 이식하는 것은 올바른 일입니까? 우리는 우리 자신의 육체에 필요한 한 장기를 포기할 권리를 가지고 있습니까? 우리는 배우자 혹은 자녀에게 장기를 줄 의무가 있습니까? 또 모르는 사람에게 그렇게 할 의무가 있습니까? 이식을 위해 장기를 제공하는 것을 당연하게 거부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사망한 사람에게서 장기를 취해도 됩니까? 장기 은행을 만드는 것은 옳습니까? 누가 장기를 얻어야 합니까? 장기를 돈 주고 살 수 있는 사람만 얻어야 합니까? 이러한 질문들 그리고 모든 의학 기술적 진보와 관련된 유사한 질문들은 결코 자명한 해답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 어떤 질문도 오직 과학적이고 기술적인 토대 위에서 대답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것들은 옳고 그름, 선과 악, 덕과 죄, 윤리적 영적 가치들의 심오한 문제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연구 분야 : 생명 윤리(bioethics)
그 결과, 새로운 연구 분야가 떠오르게 되었습니다. ‘생명 윤리’라 불리는 이 연구 분야는 그것이 생명의 문제들에 영향을 주기 때문에 옳고 그름의 문제로 다룹니다. 모든 새로운 것이 그렇듯이, 이것 또한 과거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정교회의 그리스도교 윤리의 가르침은 언제나 생명의 문제들을 다루어 왔습니다. 성경, 교회 교부들의 저작들, 교회법, 심지어 예배와 성사적인 삶조차 생명의 문제들에 관한 윤리적 함축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최근에 와서야, 세속의 그리고 종교적인 윤리학자들은, 진보해가는 의학기술적 능력에서 비롯되는 새로운 문제들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두면서, 일관되고 조직화된 방식으로, 이 쟁점들에 대응하려 노력하게 되었습니다. 이 생명 윤리 영역은 과학에서는 결코 나올 수 없는 원칙과 가치들에 의존하지 않고는 어떤 대답도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생명윤리학자들은 ‘공통 분모’가 되는 가치들을 찾습니다. 다른 학자들은 그들의 사상과 주장들을 기초시키기 위해 하나의 철학적 입장을 선택합니다. 또 다른 학자들은 종교 전통에 그들의 사상과 지침들을 기초시킵니다.
‘생명 윤리 백과사전’
인간과 관련된 이러한 쟁점들에 있어서 잘 알려진 것들을 하나로 모으기 위해, 70년대 초에 하나의 간학문적, 간문화적, 간민족적 백과사전을 출간하기로 결정되었습니다. 이 백과사전의 목표는 이 작업을 위해 하나의 이해할만한 ‘학문적 상황’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대표 편집자 조지타운 대학의 워렌(Dr. Warren T. Reich) 박사는 그리스 테살로니키 대학의 신학대학 그리스도 사회 윤리 교수인 빠나요티스 디미트로풀로스 박사를 포함한 훌륭한 편집 기획팀의 도움을 받아 이 과제에 착수했습니다. 의학, 법학, 역사학, 과학, 종교학, 신학 그리고 윤리학 등 다양한 학문분야의 저명한 학자들이 이 과제의 기여하도록 초대되었습니다. 알파벳 순서로 정리된 소논문들은 백과사전을 생명 윤리학을 위한 충분히 자족적인 원천으로 만들어주는 일련의 주제들을 두루 다루었습니다. 주제들은 크게 여섯 가지 영역에 속해 있습니다.
-. 구체적이고 법적인 문제들
-. 생명 윤리 문제의 바탕에 놓인 기본적 개념들과 원칙들
-. 윤리 이론들
-. 종교 전통들
-. 역사적 관점들
-. 생명윤리와 관련된 관련 학문 분야들.
생명 윤리 백과사전에 게재된 ‘정교회’
생명 윤리 백과서전에 ‘정교회’ 항목에 관한 글을 쓴 저자는 두 가지 주요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첫 번째는 이 주제에 대한 정교회의 관점을 보여주는 글들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나마 있는 글들도 간헐적이고 수준 미달의 것들이었습니다. 전통적인 윤리학 교제들은 몇몇 지침들을 제공하고 있었지만, 몇몇 문제들의 새로움도 많은 문제들에 대한 어떤 절대적으로 명백한 전통을 배제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두 번째 문제와 관련되었습니다. 정통 그리스도교는 그 이름이 함축하듯 그 자신을 그리스도의 참된 교회로 보고 이해하지만, 하느님 형상 안에서 성장하는 사람들의 고유하고도 적절한 행동 방식에 관하여, 교회의 모든 백성들에게, 더 나아가 모든 인류에게 영적이고 도덕적인 안내자로 사용되고자 노력해왔습니다. 정교의 참된 실존은 하느님 백성을 위해 이러한 주제들에 대한 방향제시와 지침들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함축합니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방향제시는 자의적이거나 편리한 것일 수 없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교회에 주신 하느님 자신의 계시를 반영함으로써 교회가 공통되게 수용한 신앙을 반영하고 정교의 가르침의 근본적인 확신들에 뿌리를 둔 것이어야 합니다. 오직 이러한 관점에서만 정통 그리스도교의 윤리적 사고가 생명 윤리와 관련된 이 주제들과 문제들에 대한 어떤 결론들에 도달하게 될 것입니다.
다음에 이어지는 글들에서 당신은 생명 윤리의 문제들에 대한 종합적인 정교의 윤리적 가르침을 제공하려는 첫 번째 노력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생명 윤리 백과사전」에 게재된 ‘정교회’ 항목입니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메사추세츠 주 브루클린에 소재한 성 십자가 그리스 정교 신학교에서 이 주제들에 대하여 행해진 수년 간의 사색과 강의의 결과물입니다. 여기서 채택된 입장들이 실제로 관련 주제들에 대한 정교회의 가르침을 훌륭하게 반영하고 있는 확신을 가지고 말입니다. 다른 한편, 신학자 한 사람은 결코 교회 전체를 대신하여 말할 수 없습니다. 전체로서의 교회는, 성령의 인도 아래 그 가르침을 긍정적인 방식과 부정적인 방식으로 동시에 규정합니다. 그래서 이 백과사전의 글은 생명 윤리의 영역에 사목적인 안내와 윤리적 방향제시를 위해, 교회에 제시된 하나의 진지한 노력으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신앙의 전통과 조화롭게 주장된다면, 그것은 채택되고 가르쳐지고 준수될 것입니다. 신앙의 규칙에서 벗어난 지점에서는 교회의 양심이 그것을 수정하고 바로잡게 해야합니다. 어떤 경우든 그것은 정교회 내부의 사색과 토론과 결정을 이끌어내기 위한 입문으로 사용될 것입니다. 첫 번째 단계는 모든 정교 도서관이 이 「생명 윤리 백과사전」을 구입하여 그것이 성직자나 일반 신자 모두에게 잘 준비된 정보의 보고로 사용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Dr. Warren T. Reich, Editor in Chiefm Encyclopedia of Bioethicsm New York : The Free Press, A Division of Macmillan Publishing Co., Inc., 1978.
저자는 이어지는 글들이 생명 윤리의 주제들에 대하여 하느님 백성의 윤리적 감수성과 사고를 발전시킴에 있어서, 또한 하느님의 백성이 하느님의 형상에 걸맞게 좀더 성장해 나감에 있어서, 조금이라도 가치 있게 쓰이길 바랍니다.
동방 정교회의 윤리
동방 정통 그리스도교의 윤리는 그 윤리적 판단을 거룩한 성경과 거룩한 전통 위에 세웁니다. 거룩한 전통은 “교회의 정신”을 구성하고, 세계 공의회와 지역 공의회들의 결정들, 교회 교부들의 글들, 교회법 그리고 고백 성사의 지침 등을 통해 알려집니다.
고대 문헌에서 직접적으로 다뤄지지 않은 주제들은 현대 정교회 윤리학자들에 의해 “교회의 정신”과 조화를 이루는 윤리적 판단들을 표현하려는 노력들을 통해서 다뤄집니다. 그러면 그들의 글들은 일종의 잠정적인 판단들로 여겨지고 주교 회의 혹은 교회 일반의 비판적 검토에 맡겨집니다. 현대 정교회 윤리학자들의 글들 안에는 가끔 실제적인 차이들이 있기도 합니다. 하지만 책임있는 정교회 윤리학자들은 대체로 공통된 윤리적 입장들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현대적인 생명윤리 주제들은 종종 전통 안에서 유사한 것들을 찾아서 이성의 도움을 받아 이미 확립된 교리적, 역사적, 사목적 입장으로부터 새로운 윤리적 실천을 이끌어낼 것을 윤리학자들에게 요구합니다.
기본적인 교리적 윤리적 확신들
동방 교회의 교리적 입장은 신앙의 중심된 주장들을 긍정적으로 정의함에 있어서 매우 조심드러운 경향이 있습니다. 정교회는 오히려 부정의 길, 아포타픽의 방법(말하자면, 무엇이 아니다를 말하는 방식으로)을 선호합니다. 윤리에 있어서, 어떤 실천은 신앙의 정신과 조화롭지 않은 것으로 금지될 수도 있지만, 종종 인내의 필요나 상황의 수용과 다른 어떤 긍정적인 입장이 제시되지 않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방의 정통 그리스도교는 긍정적인 혹은 ‘카타파틱’한 교리적 윤리적 선언들을 사용해 왔습니다. 이런 것들은 엄격하고 법적인 혹은 절대적인 방식이 아니라 하나의 탁월한 규범으로서 진지하게 채택됩니다. 신적 계시와 관련된 모든 긍정적 선언들, 전통은 언제나 제한된 것으로, 신적인 것에 대한 모든 인간적 이해의 필수적인 차원인 신비에 종속된 것으로 이해됩니다. 교회법과 윤리에 있어서 이것은 ‘이코노미아’의 적용으로 이끕니다. 이코노미아는 예외를 규칙에 앞서거나 규칙을 폐하는 것으로 여기지 않으면서 규칙의 예외들을 허용하는 것을 말합니다. 대부분의 경우 이코노미아의 적용의 정당성은 규칙의 엄격한 적용이 오히려 더욱 큰 해를 가져올 경우 이를 피하기 위한 것입니다. 몇 가지 핵심적인 교리적 가르침들이 생명 윤리와 관련된 특수한 문제들에 있어서 직접적으로 윤리에 적용될 수 있습니다.
신학적 인간학
우리의 인간적 실존은 이미 주어진 것이면서 동시에 잠재적인 것입니다. 몇몇 권위있는 교부들은 “하느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 존재와 “하느님을 닮도록” 창조된 인간 존재를 구분합니다. “형상”은 지성, 감정, 윤리적 판단, 자기 결정 등의 선물입니다. 비록 어두워졌고, 부상당하고, 약해졌지만, 타락한 인간성 안에서도 이것들은 인간 본성의 구성요소로 남아있습니다. “닮음”은 하느님처럼 되고, 끊임없이 확장되지만 결코 완성되지 않을 완전을 성취할 인간의 잠재성입니다. 전통적으로 우리 인간성의 충만한 성취는 신화 혹은 테오시스라는 말로 표현되었습니다. 인간 존재는 늘 “충분히 인간다움”에 미치지 못합니다. 테오시스를 성취하는 것은 우리의 충만한 인간적 잠재성을 실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윤리적으로 이 가르침은 한편으론 “인간 본성”의 실존을 수용하게 하지만, 다른 한편으론 분명 우리의 인간성을 그런 본성에 조응하는 것으로 제한하지 않습니다. “형상”은 윤리적 추론의 확실한 토대를 제공합니다. “닮음”은 어떤 규칙이나 법 혹은 정식을 절대화시키지 못하게 해줍니다.
신적인 에너지들과 인간의 자기 결정
하느님의 본질은 인간의 정신으로는 전적으로 이해될 수 없는 것이지만, 하느님의 에너지들은 모든 인간 경험들 안에 현존합니다. 신적 에너지들에 대해 말하는 것은 창조된 세상과 관련된 하느님의 행위들에 대해 말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에너지들이 인간의 자유와 자기 결정과 맺는 관계는 명백한 윤리적 함축을 가집니다. 정통 그리스도교는 비록 하느님이 역사의 주님이시지만 그분은 결코 그분의 뜻에 순종하고 부합되길 강제하거나 강요하지 않으신다고 가르칩니다. 강제된 순응은 비인간화입니다. 인간의 삶의 신화인 충만하게 성취된 인간성은 자유로워야 합니다. 하느님이 자유로우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신의 섭리와 인간의 책임이라는 문제를 제기합니다. 정통 그리스도교는 역설적 긴장 안에서 이 두 가지 모두를 부여잡습니다. 인간은 책임이 있고 행동해야 합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인간의 행위를 통해서 혹은 그것에도 불구하고 그분의 뜻을 이루십니다. 이상적인 것은 신의 의지와 인간의 의지의 완전한 협력(시너지)을 통해서 인간의 행위들이 조화롭게 하느님의 목적에 통합되는 것입니다. 이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 있는 신성와 인성의 연합이라는 정교 교리의 확장이며 적용일 뿐입니다. 윤리적으로 이것은 우리가 단지 하느님에게 기대하기만 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히려 우리는 인간의 현실과 하느님의 목적을 부합되게 하도록 자기 결정과 책임을 위임받았습니다.(플로로프스키Florovsky, pp. 113-120)
몸과 정신(영)
하느님은 물질적 실재와 영적 실재 둘 다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동방 정통 그리스도교는 실존의 이 두 가지 차원을 매우 밀접하게 연결된 것으로 바라봅니다. 이콘은 이런 믿음의 한 예입니다. 첫눈에 이콘은 거룩한 인물에 대한 유형화된 예술적 표상으로 나타납니다. 하지만 이콘작가의 목적은 인물의 영적인 현실과 물질적 현실 모두를 형태와 선과 색과 상징으로 포착하는 것입니다. 영적인 목적을 위해 성사에서 물, 기름, 빵, 포도주 등 물질적 수단을 사용하는 것은 물질과 영의 밀접한 관계에 대한 동방 정교회의 이해를 암시해줍니다. 생명 윤리학자들에게 이러한 열쇠 개념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것은 인간 생명의 영육 통일성에 대한 진지한 확신으로 이끌어 주기 때문입니다. “몸”과 “영혼”은 인간 실존의 구성요소들입니다. 부활에 대한 정교회의 강조는 인간의 삶과 충만한 성취가 인간 실존의 영적이고 육체적인 차원 모두와 뗄 수 없이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다는 이러한 관점을 확증합니다. 현대적인 언어로 말하지만, 육체와 인간성은 인간적 잠재성의 충만한 성취에 있어서 본질적이라는 것입니다.(안토니아데스 Antoniades, 1:204-208)
법, 동기, 의향
위의 관점에 기초한 정교회의 윤리적 사유는 법과 동기와 의향의 균형 잡힌 결합입니다. 도덕법은 대부분 인간 본성의 donatum에 기초합니다. 동방 정교회에서 자연법은 우선적으로 인간 사회의 구성과 유지에 필요한 기초적인 관계들과 관련됩니다. 교회 교부들에게, 십계명은 모든 사람에게 공통된 자연법의 탁월한 표현입니다.(하라카스Harakas, 1964) 어떤 유사하고 더욱 유연한 형태로는 테오시스 혹은 충만한 인간성을 향해 하느님의 형상과 닮음 안에서 성장해가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위해 지시되거나 혹은 금지된 행동 방식들이 존재합니다. 이 긍정적 명령과 부정적 명령은 성경과 교부저작들과 교회법 안에서 두루 발견됩니다. 정교 그리스도인에게 이러한 선언들은 그것들이 교회의 정신을 구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규범적이고, 교회 구성원들에게, 그리고 잠재적으로는 인간성의 충만한 실현을 위해 하느님의 형상과 닮은 안에서 성장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적합하고 알맞은 행동의 표준들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윤리적 지도의 첫 단계는 행동의 동기로서의 사랑에 근본적인 강조점을 둠으로써 율법주의 엄격한 규범주의로부터 벗어납니다. 성 삼위 하느님을 먼저 사랑 안에서 연합된 위격들의 공동체로 이해하는 삼위일체 신학에 철저하게 기초하여, 교회는 하느님처럼 되는 것은 사랑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가르칩니다. 일반적으로 도덕법의 계명들은 타인의 행복을 위한 사랑의 관심의 구현입니다. 결과적으로 대부분의 상황에서 사랑의 행위는 계명들에 의해 제공된 지침과 부합됩니다.(하라카스, 1970)
그러나 예외를 위한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있습니다. 예를 들어, 지시된 행위에 부합함이 모든 조항의 기본적인 의향, 즉 각 사람이 공동체 안에서 하느님의 형상과 닮음의 충만한 성취를 향해 전진해 나가는 것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일 때 ‘이코노미아’를 적용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렇게 해서 질서와 자비 둘 다 율법주의와 상대주의의 극단들을 피하려고 하는 그리스도교적 윤리학의 접근과 조화를 이룹니다.
생명윤리학
생명 윤리에 대한 동방 정교회의 접근을 생명의 보호와 생명의 전달이라고 하는 두 가지 주요한 기준 아래서 다루는 것이 좋습니다. 형상과 닮음, 테오시스, 인간의 자기 결정과 책임, 몸과 인간성의 밀접한 결합, 계명과 사랑의 상호침투적 관계, 그리고 참된 인간적 잠재성 실현 등과 관련된 교리에 함축된 확신들은 생명 윤리 주제 각각을 다룸에 있어서 언제나 그 안에 내표되어 있습니다.
생명의 보호
보편적으로 정통 그리스도교의 윤리적 사유는 생명은 하느님의 선물이고 그래서 다른 모든 육체적, 영적, 도덕적 가치의 필수적인 전제조건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느님의 선물로서 생명은 개인과 사회에 의해 보존되는 도덕적 선이고 그에 대해 어떤 절대적인 통제를 가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개인이나 사회는 생명을 보호하고 전하고 진작시킬 도덕적 책임을 지고 있습니다. 생명 윤리의 관심은 우선 이 중 첫 번째 두 가지와 관련됩니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생명 보존을 위한 인간의 책임은 우리에겐 인간의 생명을 종식시킬 권리가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규칙의 예외조차도 생명에의 충돌하는 요구들이 상호 배타적이고 그래서 하나의 선택이 이뤄져야 할 때 제기되는 것을 이해됩니다. 이렇게 생명의 보존과 보호는 윤리적 결정을 행함에 있어서 결정적인 요소가 됩니다. 생명은 이 세상의 다른 어떤 선, 예컨대 교육, 지성, 사회적 가치, 인류에의 봉사 등에 앞서는 전제조건이기 때문에, 정상적인 상황에서는 결코 훼손되어서는 안 되는 내재적 가치입니다.
의료 서비스(건강 관리)
자기 자신의 건강을 돌보는 것과 공중의 건강을 위한 사회적 관심이 도덕적 당위라는 것은 지극히 당연합니다.(안드루트소스Androutsos, pp. 191-195, 250) 동방 정통 그리스도교는 역사 속에서 성사적인 방식으로 신자들의 육체적 건강에 관심을 보여왔습니다. 성유성사는 “임종 예식”으로 행해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신자들을 위해 사적으로 혹은 공동체적으로 행해지는 치유의 예식입니다. 사람이 실질적으로 원죄의 조건 안에 있음을 알게 해주는 주된 요소 중 하나는 질병입니다. 피조세계와 하느님 사이의 총체적인 조화는 사실상 질병과 연약함을 제거할 것입니다. 정교회 사상에서 건강의 영적이고 육체적인 차원은 함께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종종 사제와 의사가 하나였고 같은 사람인 경우는 매우 자연스러웠던 것입니다.(콘스탄텔로스Constantelosm 1967)
부족한 의료 자원의 배분이라는 주제는 분배의 가장 일반적인 원칙을 필요로 합니다. 지불 능력도 더 위대한 인간 가치라는 귀족적 기준도 받아들여질 수 없습니다. 동방 그리스도교는 언제나 인간 생명의 본질적 가치와 사회적 가치를 구별해 왔습니다. 엄청난 어려움이 내재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교회의 관점에서 비롯되는 윤리적 의무는 의료 서비스와 생명 보호 시설과 자원을 선택된 소수에게 집중시키는 것보다 오히려 그것들의 가능한 한 폭넓은 배분을 요청합니다. 4세기 소아시아의 카파도키아에서 성 대 바실리오스가 설립했던 유명한 건강 의료 시설은 가능한 한 많은 백성들에게 혜택이 돌아가도록 고안되었습니다. 그 밖에도 다양한 시도들과 제도들이 건강한 분배에 대한 동방 그리스도교적 관점을 구현했습니다.(콘스탄텔로스, 1968, 11장)
환자의 권리
각 사람은 테오시스를 성취하는 개인적 소명을 띠고 하느님의 형상과 닮음으로 창조되었다고 이해하는 것은 각 환자가 한 인간으로서 본질적이고 범할 수 없는 존엄을 가진다는 것을 함축합니다. 개인들이 공동체 안에서만(unus christianus, nullus chrisitianus) 인간성을 성취할 수 있다는 사실은 건강한 사람들이 아픈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질 것을 요청합니다. 그러므로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람들은 치료 방법과 처치의 단순한 의료적 적용으로 책임을 다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의료적 절차의 바탕은 환자를 하느님의 형상과 닮음으로 여기는 기본적인 존중이어야 합니다. 환자는 결코 사물이 아닙니다. 결과적으로 의료적 처치는 환자의 행복이라는 관점과 동기로, 비밀을 유지해야 하고 과도한 위험을 수반하는 절차들에 대한 정보와 동의를 얻어야 합니다. 이러한 의무의 예외와 제한은 오직 환자의 복지라는 빛 아래서, 가능한 한 환자를 대신해 직접적인 책임을 가진 이들, 예를 들어 가족과의 협의 속에서 이뤄져야 합니다.
인간 실험
앞의 내용에서 강조된 것과 같은 이유로, 동방 정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인간 실험에 대해 매우 조심스러운 입장을 취합니다. 환자 자신의 행복을 위해 시행되는 의료 시험과 오류는 종종 필수적이고 필요합니다. 그러나 환자에게 직접적인 개인적 유익을 가져오는 의미 있는 전망 없이 환자를 실험과정에 종속시켜 버리는 것은 잘못입니다. 어떤 사람이라도 제3자의 이익을 위해 타인에게 이용되어야 할 의무는 없습니다. 인간의 자기 결정은 환자가 결정할 것을 요청합니다. 그러한 결정은 그 과정과 추구하는 목표와 포함된 위험에 대한 적절한 정보제공에 기초해야만 합니다. 환자는 불필요하게 자신에게 해를 가할 권리가 없습니다. 연구자는 다른 모든 실험 수단들이 완전하게 실행되고 환자에게 아무런 해가 되지 않을 것이라는 이성적인 기대가 있은 후에 인간 실험 과정들을 사용해야 합니다. 모든 경우, 실험자와 대상은 도덕적으로 최대한의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일반적인 차원에서 인류를 유익하게 하려는 바램이 개인의 생명의 보호라는 도덕적 의무보다 더 커서는 안 됩니다.
낙태
동방 그리스도교는 낙태를 반대해온 긴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교회법과 고백성사 지침 그리고 보다 공식적인 윤리 교육 안에 구현되어 있는 윤리적 가르침은 낙태를 살인의 한 형태로 정죄합니다. 인간은 몸과 영혼의 통일성이기 때문에, 그리고 정교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생명을 테오시스, 즉 충만한 인간성의 실현을 향한 형상과 닮음의 지속적이고 결코 끝이 없는 발전으로 바라보기 때문에, 윤리적으로 볼 때 태아 형성 발전의 특별한 단계들의 완성은 낙태의 문제와 결부되지 않습니다.
성 대 바실리오스는 자신의 두 번째 카논에서 특별히 형성된 태아와 형성되지 않은 태아의 인위적 구별을 금지했습니다.(The Rudder, pp. 789-790) 이렇게 해서, 어떤 낙태도 악행으로 보았던 것입니다. 인간 실존의 육체성과 인격적 측면은 우리 인성의 본질적 구성 요소로 이해되기 때문에, 태아는 비록 결핍되고 불완전하더라도 정상적인 상황에서 결코 파괴될 수 없는 것입니다. 동방 정교회 윤리학자들은 경제적 사회적 이유에 호소하여 생명을 돈, 명예, 편리보다 가치가 적은 것이라고 주장하는 반대 논리들을 무가치한 것으로 거부합니다. 현대의 유전학적 지식으로 무장한 그들은 또한 여성은 자기 자신의 몸을 통제할 자격이 있기 때문에 낙태가 정당화되어야 한다는 주장 또한 거부합니다. 자기 결정이라는 기본적인 확신은 거부되지 않습니다. 여기서 거부되는 것은 태아가 산모의 신체조직의 일부라는 주장입니다. 태아는 결코 산모의 몸이 아닙니다. 태아는 산모가 돌보고 양육하도록 맡겨진 또 다른 인간 존재의 몸이고 생명입니다.
산모의 생명이 태아로 인해 위험하다고 판단될 경우에만 낙태의 가능성을 생각해보는 것이 도덕적으로 적절합니다. 하지만 여기서조차 가장 주된 가치는 생명의 보전입니다. 비록 대부분의 경우에 산모의 생명을 보존하는 것이 선택될지라도, 여러 가지의 신중한 고려들이 이뤄질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사건의 악함은 인정되지만 당사자의 인격적 죄책은 경감되는 “비고의적 죄”로 구분됩니다.
장기 이식
장기 이식의 경우 가장 중요한 윤리적 성찰은 두 가지입니다. 그것은 제공자에게 가해질 잠재적인 해악과 수용자의 필요입니다. 역사적으로 정교회는 똑같은 것은 아니지만 수혈과 피부이식과 같은 유사한 수술에 대해 반대하지 않았습니다. 두 경우 제공자의 생명에 대한 근본적인 위협이 감지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수용자의 생명을 구하는 결과는 더욱 본질적이기 때문입니다. 유사한 생각들이 장기 이식에 대한 정교회의 판단에 영향을 줍니다. 어떤 경우에도 장기 증여의 윤리적 함축을 무시하거나 경시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 손실로 인해 잠재적 기증자의 생명을 해치고 위협할지도 모르는 장기의 증여는 결코 요구되지 않으며 그 누구에게도 도덕적인 의무가 될 수 없습니다. 기증자의 건강 조건과 육체적 건장함이 혀용 한다면, 어떤 이식은 반대할 수 없습니다. 신장 이식이 이런 경우입니다. 건강한 사람은 자신의 건강이 나빠지지 않을 것임을 알고 하나의 신장을 제공하는데 동의할 수 있습니다.
장기이식의 수용자는 좋은 건강 속에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기증자의 위험을 정당화해주기 위해 정상적인 삶의 회복에 대한 실체적인 기대가 있어야만 합니다.
심장 이식은 특별한 경우를 보여줍니다. 객관적으로 심장이식은 다른 장기이식과 구별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기증자의 사망을 전제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정교회 지도자들은 교회의 경건 문학에서 ‘심장’이 영혼의 근본자리로 이해되어 왔기에 심장 이식에 반대해왔지만, 대부분의 지도자들은 원칙적으로 심장 이식에 대해 부정적으로 응답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수용자를 위해 기증자의 죽음을 재촉하려는 유혹에 대해서만큼은 깊은 우려를 가지고 표해왔습니다. 또한 이 수술이 아직 높은 성공 확률을 보장해주지 않는 한, 조직 거부 반응이 더욱 잘 이해되기 전까지는 이러한 수술들을 계속하는 것이 도덕적 논쟁의 여지가 있습니다.
약물 중독
의사가 적절하고도 적법한 방식으로 처방하여 건강의 회복이나 비정상적 고통의 완화 등의 목적으로 사용하는 것과는 다른 어떤 목적으로 흥분제, 억제제, 환각제 등을 사용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하지만 “비고의적 죄”에 대한 가르침 때문에 정교회의 윤리는 약물 중독의 상태의 악함을 인정할 수 있고, 또한 악의 본질은 인격적 자기 결정이 상실되었다는 것, 그래서 인격적 책임도 상당부분 배제된다는 것을 승인합니다. 정교회의 문헌들은 종종 “허약”과 “질병”을 죄의 조건들로 이해합니다. 약물 중독의 경우 치료는 자기 결정 능력의 회복입니다. 정교회의 관점에서 볼 때, 약물중독과 알콜 중독이 악이요 죄라고 판단하는 것과 다른 한편 그것들은 또한 하나의 질병이라고 판단하는 것은 결코 상호 모순되지 않습니다. 물론 이것은 모든 허약함과 질병이 개인의 고의적인 죄의 결과라고 말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이러한 입장은 특별히 원죄에 관한 정교회의 교리에 의해 부정됩니다.
정신 건강 : 가치들, 치료들, 제도들
정신 건강에 대한 동방 정교회의 입장의 핵심은 테오시스 교리 안에서 인간을 하나의 총체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참되고 충만한 행복은 우리 각자가 하느님과 맺는 관계의 결과입니다.(데메트로풀로스Demetropoulos, pp. 155-157) 정신 건강은 이 총체적 관계의 한 차원입니다. 그 어떤 개인도 이 관계를 완벽하게 성취하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 모두가 어느 정도 충만한 인간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 똑 같은 방식으로 우리 모두가 어느 정도 충만한 정신 건강을 결여하고 있다는 것을 언급해야만 합니다. 메타니아 혹은 회개에 관한 정교회의 이해는 마음의 변화, 인간 정신의 변모와 변화를 함축합니다. 중요한 것은 동방 교회의 교부들의 가르침은 모든 인간에게 그 자신의 인간적 목적과 운명으로의 끊임없는 돌이킴(회개)의 필요성을 강조한다는 것입니다.
최근의 어떤 연구들은 전통적인 영적 수련 방법들과 표준적인 정신치료 이론, 방법, 접근들과 관련시키고 있습니다.(파로스Faros) 물론 거기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하지만 고대의 영적 실천들과 현대의 심리학 사이에는 상당한 병행들이 발견되고 있습니다.
정교회의 윤리는 정신 질환자를 동정어린 조력을 필요로 하는 동료 인간으로 바라봅니다. 그들의 본질적 인간성을 비하하는 치료법들과 정신질환자를 사회적으로 비인간화하고 도움과 관계와 치료지원을 부정하는 태도들은 그 자체로 비도덕적이고 비인간화입니다.
노인 문제
교회의 윤리의식 안에서 어른들에 대한, 특별히 나이 드신 부모들에 대한 존경과 존중은 매우 중요한 도덕적 책임입니다. 거기에는 자녀들은 개인적으로 그들의 나이 드신 부모들을 돌보아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게 자리 잡고 있습니다. 자녀들이 그들의 나이 드신 부모들을 부양하는 것이 참으로 불가능하는 그런 상황에서만 부모들은 돌봄을 받을 수 있는 적절한 기관들에 모셔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기관들은 오래전부터 동방 정교회의 사회 선교의 한 부분이었습니다.(콘스탄텔로스Constantelos, 1968, chap. 13.)
죽음, 죽어감 그리고 안락사
육체적 죽음에 대한 전통적인 정의는 “영혼과 몸의 분리”입니다. 그러한 정의는 객관적인 관찰에 종속도지 않습니다. 그래서 죽음의 의학적 표지들과 임종과정의 시작을 결정하는 것은 신학의 영역 안에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시한부 환자와 관련하여, 몇 가지 구별이 행해질 수 있습니다. 육체적 생명은 보통 자신의 생리적 활동을 유지하는 인간의 능력을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육체적 죽음은 몸의 상호관계된 체계가 파괴된 곳에서 시작합니다. 죽음은 체계 붕괴가 돌이킬 수 없게 되었을 때 발생합니다. 어쩌면 육체적 생명과 죽음은 죽어감의 과정이 실제적으로 시작되는 것을 분별해낼 수 없는 하나의 계속적인 사건이라 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와 의사들은 전통적으로 생명을 유지하고 죽어감과 죽음을 막기 위해 가능한 모든 것을 해야 한다는 견해를 가집니다. 약물, 외과적 수술, 심지어 인공 장기 등의 의학적 사용은 곧 정상으로 돌아가도록 혹은 전체 장기 체계의 정상적인 기능에 근접하도록 도와줄 수 있다는 합리적인 기대가 있을 때 적법하게 사용된 것으로 간주됩니다.
특별히 문제가 되는 것은 이제 의학적으로 복잡한 인공장기들, 약물처치, 수혈 등으로 육체를 “살아있게”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조건 아래서 몸의 유기적 기능이 어떤 개연성의 정도로까지 회복될 것을 기대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특별히 생체 기능의 소실과 함께 두뇌 활동의 어떤 명료성도 없을 때, 우리는 환자가 종교적인 의미에서 더 이상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고, 그리고 실제로는 단지 몇 개의 장기만 기능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경우라면 인공적인 수단들을 계속해서 사용하는 것이 도덕적 의무는 아닙니다. 동방 정교회의 기도서는 죽어가고 있는 이들을 위한 온전한 예식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은 매우 흥미롭습니다. 죽음이 연장되고 많은 “죽음과의 투쟁”을 통해 도움 받고 있는 개인의 경우, 기도서의 핵심 문장은 영혼을 몸에서 분리해달라고, 그렇게 해서 죽어가는 사람에게 안식을 허락해 달라고 하느님께 간청합니다. 기도문은 하느님께 “당신의 종을 참을 수 없는 이 고통과 계속해서 악화되고 있는 이 질병에서 풀어주시어 그에게 안식을 주소서”라고 간청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모든 정교신자들에게 생명과 죽음을 궁극적으로 관장하시는 분이신 하느님께 드리는 기도라는 사실이 강조되어야만 합니다. 결과적으로 앞의 논의들은 그 어떤 경우에도 안락사 실행을 지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안락사는 불치의 이른 환자의 생명을 종식시키는 것을 도덕적으로 정당화하기 위해 혹은 도덕적으로 요구하기 위해 주장된 것입니다. 생명이 그 자체로 유지될 수 있다는 어떤 실제적인 기대도 가질 수 없을 때, 죽어가는 사람에게 죽음을 허락하는 것, 생명의 주관자께 “죽기 위해 싸우는”이의 생명을 거두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다른 사람의 생명을 종식시키기 위해 능동적으로 개입하는 안락사와는 다른 것입니다. 정교회의 윤리는 죽어가는 환자의 의도적인 종식의 선택을 거부합니다. 만약 그것이 환저의 인지와 동의 없이 행해졌다면 그것은 하나의 특수 살인 행위이고, 만약 환자가 허용한 것이라면 그것은 자살이라고 보는 것입니다.(안토니아데스Antoniades, II, pp. 125-127) 안락사에 대한 가장 중대한 비판은 “참을 수 있는 고통”과 “참을 수 없는 고통” 사이의 경계를 정하는 것은 극도로 어렵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동방 정교회에서는 진지하게 많은 영적 성장들이 고통을 통해서 성취된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로마 8:17-39)
윤리적 결정은 결코 구체적이지도 절대적이지도 않습니다. 그것을 지배하는 원칙들은 다소간 해석에 따라 다르고 그것에 종속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안락사를 권리나 의무의 반열에 올려놓는 것은 인간으로서 우리는 생명의 관리인이며, 그 생명은 우리 밖의 다른 어떤 원천에서 비롯되었다고 하는 근본적인 윤리적 확신과 직접적으로 충돌하게 될 것입니다. 게다가 단지 오류로 인해서만이 아니라 이기적 목적에 기반한 결정들로 인해, 인간 생명의 거룩한이라는 근본적인 원칙을 묵살하고야말 막대한 가능성이 안락사를 반박하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정교회는 환자가 가능한 한 편안하도록 해주고, 인내와 용기와 회개와 기도의 기회를 제공해주는 것이 의사와 가족 모두의 의무라고 가르칩니다. 항상 교회는 해롭고 불필요한 자발적 학대와 고통을 비도덕적이라고 가르쳐왔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교회는 또한 고통 안에서 “세상의 논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긍정적 가치를 감지해 왔습니다.
정교회 윤리에서 인정되는 유일하게 “좋은 죽음eu-thanasia”은 도덕적이고 영적인 순결함의 정신 안에서 하느님께 희망과 신뢰를 두고, 그분의 왕국의 지체로서, 자기 인생의 마지막을 수용하는 그러한 죽음입니다. 참된 인간성은 임종의 순간에도 성취되어 갑니다.
생명의 전수
정교회의 윤리적 사고는 인간 생명의 전수는 그것의 보전 못지않게 인류의 근본적인 책임이라고 여깁니다. 교회는 이것을 인간 존재가 하느님의 창조적인 사역에 협력하고 기여하도록 신성하게 선택된 수단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 생명의 전수는 이렇게 해서 거룩하고 신성한 도덕적 책임입니다. 이 책임은 일반적으로 인간적인 책임이고, 결혼 성사에서 서약되고 성화되고,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삶의 한 부분이 됩니다. 비록 결혼의 유일한 목적은 아니지만, 인간 생명의 전수는 매우 중요한 의무요 도덕적 책임입니다. 만약 지금 살아있는 각자와 모두가 인간 생명의 전수에 기여하는 일에 실패한다면 인간 생명이 지구상에서 완전히 사라지게 되는 것은 시간문제일 것이라는 사실만 보아도 이것은 명백해 보입니다. “자식을 낳고 번성하라”(창세기 1:28)는 하느님의 명령은 정통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에서 근본적인 도덕적 명령입니다. 이러한 폭넓은 틀 안에서 우리는 ‘인간의 성(性)’, 피임, 인구, 인공수정, 시험관 아기, 유전자 검사와 유전 상담 등의 특별한 문제에 다가갑니다.
인간의 성(性)
교회는 인간의 성이 하느님께서 주신 인간 삶의 한 차원이고, 그것의 충만한 성취는 혼인 관계 안에 있다고 가르칩니다. 이것은 또한 경험적인 관찰을 통해서도 지지됩니다. 왜냐하면 생물학적 기초에 있어서 성의 차이는 분명 생식을 목적으로 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생식은 갓난아기가 육체적으로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발전 단계에 이르기까지 오랜 시간을 요한다는 사실로 인해, 또 사회적으로, 교육적으로, 감정적으로, 그리고 경제적으로 성숙하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에, 인간 종족은 오래 전부터 이 생식의 목표에 달성하기 위해 두 성(性) 간에 일종의 지속적인 관계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이 지속적인 관계가 바로 결혼입니다.
하지만, 결혼의 목표는 이러한 차원 하나로 제한되거나 축소되지 않습니다. 결혼의 목적과 그것의 중요도는 정교회 지도자들(교부들뿐만 아니라 현대의 신학자들) 사이에서도 조금씩 차이가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 성경과 교부들은 결혼에 있어서 적어도 우선권을 논할 수 없는 네 가지 중요한 목적을 주장합니다 : 자녀의 출산과 양육, 부부 상호간의 도움, 성적 욕구의 만족, 상호성과 일치 즉 사랑 안에서의 성장.
이 목적들 안에서 인간의 성의 전체 목적이 윤리적으로 인간적으로 성취되고, 완성됩니다.(콘스탄텔로스, 1975)
윤리적으로 이러한 입장의 필연적 결과는 다음과 같습니다. 인간의 성의 모든 차원은 결혼 안에서 온전히 성취됩니다. 그리고 결혼한 사람은 위에 언급된 바의 모든 차원에서 결혼을 풍요롭게 하고 충만하게 하려고 노력해야 할 도덕적 의무를 가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