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계명
십계명은 구약성서의 탁월한 한 부분으로서, 하느님 당신께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셨고, 세속 사회의 도덕률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Decalogue(deca 열, logos 말씀)로도 불리는 십계명은 한편으로는 인류로 하여금 참 하느님을 믿게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땅위에서 하느님의 의지가 성취되고 적용되는 신적인 사회가 이룩되게 하기 위한 도덕률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십계명은 그리스도교 문명의 보물이자 기념물로서, 훼손되지 않은 채 우리에게 전해져 왔습니다. 그리스도교 교회는 하느님과 사람들을 향한 규율로서, 기본적인 도덕률로서 십계명을 구체화해 왔습니다. “아마도 십계명 보다 더 종교와 도덕에 영향을 끼친 인간의 문서는 없을 것입니다.”
모세는 구약성서에서 아주 두드러진 인물 중 한명입니다. 그는 지도력과 정치력뿐만 아니라, 특히 유대교의 종교적 예언자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하느님에 의해, 그의 운명은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의 속박에서 벗어나게 하여 이집트와 팔레스타인 사이에 있는 시나이산 북쪽의 광야로 이끄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이집트에서 추방되어 이 지역에서 그의 조언자였던 장인 이드로와 함께 40년을 보냈기 때문에 이 지역에 대해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탈출한 3개월 후, 이들의 지도자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의 가호 아래 평화롭고 기도 충만하게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전능하신 하느님께 계시를 간청했습니다. 하느님께서 모세의 간청에 응답하시어, 시나이 산에 오르라 하셨고, 여기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느님의 말씀인 당신의 계명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야훼께서 말씀하신 것은 모두 그대로 실천하겠습니다.”(출애굽기 19:8)라고 고백했습니다.
모세는 시나이 산에서 주님과 함께 40일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시나이 산에서 모세와 이야기를 다 마치시고 하느님께서 손수 돌판에 쓰신 증거판 두 개를 모세에게 주셨습니다.”(출애굽기 31:18) 이렇게 해서 시나이 산에서 계명들이 모세에게 신성하게 계시되었고, 두 개의 돌판에 새겨져 모세에게 주어졌던 것입니다. 하지만 우상숭배하는 무리 때문에 산에서 내려오던 모세는 이 증거판을 깨뜨렸습니다.(출애굽기 32:19) 그리하여 새로운 증거판으로 대체되었습니다.(출애굽기 34:1)
십계명은 구약성서에서 두 군데에 제시되는데, 바로 출애굽기 20장 1절에서 17절까지와 신명기 5장 6절에서 18절까지입니다. 우상숭배 금지와 안식일 준수의 규율과는 별도로, 십계명에는 인류의 공동선을 위한 삶의 규율이 있습니다. 마르코의 복음서(12:19~31)에 언급된 바와 같이,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의 규율로 요약되는 주님의 산상 설교의 가르침으로 인해 십계명은 그 깊이를 더하게 되었습니다. “마음을 다 기울이고 정성을 다 바치고 힘을 다 쏟아 너의 하느님 야훼를 사랑하여라.”와 또한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아껴라. 이것들보다 더 큰 계명은 없느니라.”(신명기 6:4~5, 레위기 19:18 참조)
초기 그리스도교 저자인 테르툴리아누스는 십계명이 돌판에 기록되기 이전에 이미 사람들의 마음에 새겨졌다고 주장했다. 십계명은 예비신자 교육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으며, 오늘날 그리스도교 교회의 교리 입문서에서도 중요한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신약성서의 가르침으로 비추어, 이후 이어지는 글에서 십계명을 간략하게 해석하도록 하겠습니다.
사람과 하느님과의 관계
처음 4개의 계명은 하느님을 향한 신자들의 헌신에 대한 지침입니다. 두 돌판 중 하나에 기록된 이 계명들은 왜곡이나 타협없이 전능하신 하느님에 대한 두려움과 경외감으로 받아들여지고 이해되어야 합니다. 우리 하느님 주님께서는 우리 삶의 일부분이 아니라, 오히려 주저함이나 유보함 없이 봉헌되는 우리 삶의 총체성을 요구하십니다. 이들 계명에서 우리는 하느님과 사람의 총체적 교감을 볼 수 있습니다. 신자들이 전능하신 하느님을 직접 대면하여 교감할 수 있도록 허락되었다는 사실, 아들의 지위에 있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 또한 하느님의 아들로 불리고 땅에서 하느님의 의지를 실현하는 전령으로 지명되었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일 뿐만이 아니라, 동시에 엄청난 특권입니다.
제 1 계명
“나는 너의 하느님, 주님이다. … 너희는 내 앞에서 다른 신들을 섬길 수 없다.”
“이 모든 말씀은 하느님께서 하신 말씀이다. 너희 하느님은 나 야훼다. 바로 내가 너희를 이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낸 하느님이다. 너희는 내 앞에서 다른 신을 모시지 못한다.”(출 20:1-3)
모세는 산을 내려와 백성들에게로 가서, 하느님께서 이들에게 말하라 명하신 것을 알렸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나는 너희의 하느님 주님이다.”라고 하시며 이 모든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인류를 유일한 하느님에 대한 올바른 찬양과 믿음으로 인도하는 분으로 당신 스스로를 규정하셨습니다. 인류의 역사에 참여하시는 한 분의 하느님, 백성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또 그들에게 답하는 한 분의 하느님이십니다. 유대인들이 초월적 존재를 믿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참 하느님에 대한 참된 앎과 믿음의 길로 인도하는 것은 구약성서 저자들의 임무일 뿐만이 아니라, 신약성서 메시지의 책무였습니다. 바로 여기 이 첫 번째 계명에서 순결한 믿음의 문제는 신자들에게 절체절명의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은 곧 참되시고 오직 한 분이신 하느님 아버지를 알고 또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요 17:3)
하느님께서는 인류에게 당신 스스로를 우주를 창조하고 영속하여 통치하시는 유일한 주님으로 드려내셨기에, 인류의 신앙을 이끌고 당신의 왕국으로 안내하십니다. 제 1 계명은 참 하느님으로 향하는 올바른 신앙이라고 불립니다. 이 지식의 총체성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제공되었고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전능하신 하느님에 대한 온전한 지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제 1 계명에서 우리는 하느님께서는 다른 잡신들에 대한 믿음에 반대하심을 읽을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참 하느님을 믿든지, 혹은 소위 “다른 신들”이라 불리는 우상이나 미신을 믿고 있습니다. 절대자에게 닿으려는 천성적 경향과 모험으로 인류는 다른 작은 신들, 미신이나 또 다른 헌신의 대상에 대한 믿음에 빠져 여러 차례 실패함으로써, 이 잠재적 성향을 오용했습니다.
인도되지 않는 부주의한 헌신과 예배는 사람들을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게 이끕니다. 이 계명은 어떤 신앙에도 관심이 없는 무신론자들을 향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기꺼이 믿으려는 불타는 가슴을 가진 사람들에게 호소합니다. 다른 작은 신들이라는 것은 탐욕, 욕망, 부주의한 교육, 그리고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내고 그것에 절하며 헌신하는 여러 대상과 조건들을 말합니다. 이 때, 제 1 계명의 책무는 구약성서에 제시된 방법으로, 특히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한 분이신 하느님께 헌신하도록 신자들을 이끄는 것입니다. 한 분이신 참 하느님에 대한 진실한 믿음은 기도와 학습을 통해 매일 매일 지속적으로 증진시켜야만 하며, 그렇게 해서 다른 작은 신들에 대한 유혹이 사람들을 오도하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로는 이런 잘못을 인지하고 고린토인들에게 “우상 숭배를 멀리하십시오”(고린토1 10:14)라고 충고했습니다. 또한 다양한 욕망과 목적들로부터, 예를 들자면 “우상 숭배나 다름없는 탐욕 따위의 욕망”(골로사이 3:5)들로부터 신자들을 보호하고자 했습니다.
제 2 계명
“그 모양을 본떠 새긴 우상을 섬기지 못한다. 그 앞에 절하며 섬기지 못한다.”
“너희는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 위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어떤 것이든지 그 모양을 본떠 새긴 우상을 섬기지 못한다. 그 앞에 절하며 섬기지 못한다. 나 야훼 너희의 하느님은 질투하는 신이다. 나를 싫어하는 자에게는 아비의 죄를 그 후손 삼 대에까지 갚는다. 그러나 나를 사랑하여 나의 명령을 지키는 사람에게는 그 후손 수천 대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은 사랑을 베푼다.”(출 20:4-6)
제 2 계명은 제 1 계명의 연속으로, 신자들로 하여금 새긴 형상을 가지지 않도록 이끕니다. 이 명령은 신자들이 참 하느님을 무시하고 창조된 형상에 대한 유혹에 빠지는 일이 없도록 보호하기 위해 주어진 것입니다. 어떤 신자들은 자기가 만들어낸 어떤 대상이나 형상들을 숭배합니다. 그리하여 그것은 우상이 되고 맙니다. 그리스도인의 종교적 삶 안에는 신자의 주의와 헌신을 몰입시키는 많은 대상물과 몸짓이 있습니다. 제 2 계명은 천상의 것이든 지상의 것이든 그 어떤 것이라도 한분 주님에 대한 순결한 믿음을 대체하지 못하도록 금합니다. 만약 한 분이신 주님과 하느님을 순수하게 믿는데 복무하고 영양을 공급하는 일에 적합하게 사용되지 않는다면, 지식, 기술, 돈, 일 등도 또한 새긴 형상과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이 계명이 교회의 성물들과 이콘의 사용을 금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성물들은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 하느님에 대한 진실한 신앙을 표현하는데 도움을 줍니다. 신자들은 “그 앞에 절하며 예배”하는 것이 아닙니다. 출애굽기 36장 35 ~38절에 언급된 것처럼 장막 예배당에 그려지고 조각된 헤루빔 상과 천사상은 우상으로 여겨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존재하지도 않는 신성의 형상들을 만들어 사용하는 것은 우상숭배입니다. 왜냐하면 “불멸의 하느님을 섬기는 대신에 썩어 없어질 인간이나 새나 짐승이나 뱀 따위의 우상을 섬기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로마인 1:23, 시편 135:15~18 참조)
제 3 계명
“너희는 너희 하느님의 이름 야훼를 함부로 부르지 못한다.”
“너희는 너희 하느님의 이름 야훼를 함부로 부르지 못한다. 야훼는 자기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자를 죄없다고 하지 않는다.”(출 20:7)
제 3 계명은 절대 헛되이 주님의 이름을 부르지 말고 경외심과 두려움으로 부르라 강조합니다. 기도, 묵상, 성가를 부를 때, 그리스도교 진리를 가르칠 때, 신자들은 항상 하느님의 이름을 깊은 헌신과 존경심으로 사용해야 합니다. 위선자들은 하느님 이름이라는 외투를 두르고 악한 생각으로 옷입었기 때문에 주님의 이름을 헛되이 사용합니다. 예를 들자면, 바리사이파 사람 비유에서 바리사이파 사람은 큰 목소리로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고 손과 눈을 쳐들지만 그는 하느님의 이름을 헛되이 사용했습니다. 그의 기도는 회개와 겸손과 헌신이 아니라, 오히려 오만한 개인적 만족을 얻기 위함이었기 때문입니다.
신성의 존귀함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 혹은 자신의 믿음을 가벼이 고백하고 주님의 이름을 경외심과 두려움이 아니라 부주의하게 사용하는 사람이 바로 헛되이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입니다. 실상 직장이나 가장에서 동료나 가족을 대할 때 하느님의 계명은 지키지도 않으면서 스스로 그리스도인인 척하는 지체 높은 사람들은 이렇게 하느님의 이름을 헛되이 부르는 자인 것입니다. 이 계명은 “모든 논쟁을 그치게 하는”(히브리인 6:16) 진리를 세우기 위해 선한 맹세를 행하는 사람들을 금하는 계명이 아닙니다. 이 계명은 다만 거짓 맹세와 위증을 금하는 것입니다.
복음의 법은 마태오의 복음서 5장 34절 “아예 맹세를 하지 마라.”와 로마서 12장 14절에 “저주하지 말고 복을 빌어주십시오.”라고 기록된 것처럼 신자들이 맹세하는 것을 금하고 있습니다. 이 계명은 헛되이 주님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것이지, 회개와 인도를 위해 신실하고 겸손하게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까지 금지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제 4 계명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켜라.”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켜라. 엿새 동안 힘써 네 모든 생업에 종사하고 이렛날은 너희 하느님 야훼 앞에서 쉬어라. 그 날 너희는 어떤 생업에도 종사하지 못한다. 너희와 너희 아들 딸, 남종 여종뿐 아니라 가축이나 집 안에 머무는 식객이라도 일을 하지 못한다. 야훼께서 엿새 동안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시고, 이레째 되는 날 쉬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야훼께서 안식일에 복을 내리시고 거룩한 날로 삼으신 것이다.”(출애굽기 20:8~11)
거룩하게 안식일을 지키라는 제 4 계명은 나머지 날들이 거룩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각 신자들이 자신의 삶에서 끊임없이 당신의 계명에 순종하기를 원하십니다. 신자들의 행동과 생각은 모든 일에서 경건해야 합니다. 일할 때나 쉴 때나, 공부할 때나 예배할 때나, 한 주간 통째로 거룩해야 하고 하느님의 이름에 걸맞는 가치있는 삶이어야 합니다. 이 계명은 특별히 주 중 하루 온전히 주님께 우리의 삶을 봉헌하도록 주어진 것입니다. 즉, 하느님 말씀을 더욱 깊이 공부하고 묵상하고, 우리 돈과 즐거움의 한 부분을 희생시켜, 주님의 이름으로 타인을 도우며, 새로운 주의 시작을 준비하기 위한 것입니다. 종교를 가진 사람이 토요일과 일요일을 자신의 쾌락과 휴식, 더 나아가 불경한 일에 사용하는 것은 매우 실망스러운 현상입니다.
한편, 이 계명은 종종 안식일에는 아무 것도 해서는 안 된다는 뜻으로 오해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와는 반대로, 안식일은 기도와 고백 그리고 사회와 이웃을 위한 선행과 고귀한 활동 등을 통해 사람의 내적 세계를 새롭게 하라고 따로 구별된 날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안식일에 많은 사람들을 치료하셨습니다.(루가 13:14) 그리고 이 계명을 새롭게 해석하셨고, 그래서 당신의 발자취를 따르려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용기를 주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일요일을 “휴식”의 날로 여깁니다. 또 이날은 도덕적 질서의 회복을 개시하신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는 날이기에, 주님의 날이라고 부릅니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
남은 계명은 두 번째 돌 판에 속한 것으로, 신자과 그 이웃의 관계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들 계명은 거의 부정문의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계명들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해석은 긍정적 맥락을 포함합니다. 강조되어야 하는 것은 “내가 하지 말아야 하는 어떤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주님의 이름으로 또한 이웃의 유익을 위해 “내가 해야만 하는 어떤 것”입니다.
제 5 계명
“너희는 부모를 공경하여라. 오래 살 것이다.”
“너희는 부모를 공경하여라. 그래야 너희는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 주신 땅에서 오래 살 것이다.”(출애굽기 20:12)
부모됨은 십계명의 중심에 있습니다. 이 계명은 자신의 부모를 사랑할 뿐만 아니라 특히 그들을 공경하라는 훈계로, 어린이와 젊은이들을 향한 것입니다. 부모됨은 하느님에 의해 창조되고 번식의 책임을 담보하는 신성한 제도입니다. 한 가정의 부모는 이들 가족을 향한 하느님 은총의 통로입니다. 부모는 모두 하느님의 뜻 안에서 자녀들을 양육할 수 있도록 교양되고 격려됩니다. 이 계명은 무엇보다도 먼저 가정에서 하느님의 계명을 온전하게 지킬 사명을 가지고 하느님에 의해 보내진 부모에게 적용됩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상황은 우리가 온갖 청소년 비행의 원인들로 지목되고 있는 수많은 부모들의 행태로 인해 결코 자랑스러워 할 수 없는 상태입니다. 부모들은 가정을 참 하느님을 향한 헌신과 예배, 그리고 축복의 제단으로 만들라는 대단한 특권을 위임받았습니다. 부모는 그들의 자녀들에게 지상과 천상에서의 선한 시민의 형상을 제시하기 위해, 먼저 그들 자신이 하느님의 길을 걷는 본보기가 되는 본성적 역할을 부여받았습니다.
그러한 부모들은 복되며 본성적으로 자녀들에게 애정을 보여주기 마련입니다. 하느님의 뜻에 따라 자녀들의 감성을 형성해 나감으로써, 그들은 자녀들의 부모뿐만이 아니라 그들의 친구가 됩니다. 이러한 창조적 과업에서 성공하도록, 그들은 본성적으로 자녀들에 대한 사랑을 부여받았고, 그 사랑은 부모들로 하여금 자녀들을 행복의 길로 인도할 수 있게 해줍니다.
이 계명은 노소를 불문하고 모든 아들딸들을 향합니다. 자녀들은 부모에게 사랑을 표현할 뿐만 아니라 평생토록 부모를 공경할 것을 요청받습니다. 십계명이 부모됨을 그 계명 안에 포함시켜, 존경과 순종을 받아 마땅한 거룩한 특권을 가진 부모를 영예롭게 하는 것은 매우 주목할 만한 것입니다. 자녀는 부모를 영예롭게 해주어야 합니다. 그것은 부모를 하느님의 전령으로 여기고 순정하는 것, 부모와 함께 사랑과 행복을 공유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늘날 사회는 부모와 자녀의 분리를 조장합니다. 대자연이 노인들에게서 모든 능력들을 빼앗아가고 육체적 매력을 지워버림으로써 그들을 무력하게 만들어 버리는 시기는 특별히 젊은이들이 그들에게 지속적인 공경을 보여줘야만 하는 시간입니다. 이렇게 할 때, 자녀들의 생은 천상으로부터 보상을 받아 오래도록 땅에 살게 될 것입니다. 자녀들은 부모에 대한 의무를 다할 수 있도록 하느님의 능력과 인도를 구해야 합니다.
제 6 계명
“살인하지 못한다.”(출애굽기 20:13)
살인은 금지됩니다. 그것은 3대 죄악 중 하나로 간주됩니다. 이 계명이 백성에게 주어졌을 당시에는, 그것은 동료의 파멸의 제거하는데 목적을 두는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람의 생명을 빼앗는 것뿐만 아니라, 그런 생각조차도 금지되었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겐 또한 자신의 생명을 버리는 것도 금지되었습니다. 사람의 생명은 자신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모든 생명이 돌아가야 할 창조주께 속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계명은 어느 누구도 중상과 기만으로 타인의 건강과 존엄을 약화시키고 사람의 생명을 단축시킬 권리가 없음을 상기시킵니다. 그러므로 이 계명은 경솔한 말과 부주의한 행동, 그리고 심지어 드러나지 않은 악의도 금지합니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타인을 공격하는 것이고 타인의 건강과 용기를 꺾고 좌절시키기 때문입니다. 이 계명은 오늘날 수많은 목숨을 앗아가는 부주의한 운전도 금지합니다.
비록 불의한 적의 불의한 전쟁에 맞서 시민의 목숨을 보호하기 위해 벌이는 방어적인 전쟁은 정당화될 수 있다 해도, 일반적으로 이 계명은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뿌리채 뽑아버리는 전쟁도 금지하고 반대합니다. 심지어 신약성서는 공격을 당할 땐 오히려 공격자를 진정시키고 연민과 사랑으로 그의 복을 위해주라고 권면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공격자를 조롱하거나 도발하지 않고, 오히려 그와 협력하고 세상의 평화를 위해 기도하고 작업하도록 권고 받습니다.
제 7 계명
“간음하지 못한다.”(출애굽기 20:14)
제 7 계명은 신자들로 하여금 가정의 신의에 불명예를 가져오는 모든 행위들을 피하라고 가르칩니다. 이 계명은 혼인관계 밖에서 이뤄지는 어떤 행위도 금합니다. 개인과 국가의 도덕적 능력을 견고하게 만들기 위해서 삶의 순결성이 장려됩니다.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신자들은 스스로를 보호하도록 교육받습니다. 신자들은 한편으로 외적 영향과 유혹을 피하도록 권고 받고, 다른 한편으로는 순결의 이상을 세우고 친구와의 관계를 통해, 그리고 가치있는 활동을 통해 이를 키워가도록 권면 받습니다. 신자들은 하느님 의지의 목초지로 자신들을 이끌어 주시도록 전능하신 하느님께 도움을 구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로는 고린토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신앙의 순결을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하느님의 성전이며 하느님의 성령께서 자기 안에 살아 계시다는 것을 모르십니까? 만일 누구든지 하느님의 성전을 파괴하면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을 멸망시키실 것입니다. 하느님의 성전은 거룩하며 여러분 자신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이기 때문입니다.”(고린토1 3:16~17) 이 계명은 사람들이 육적인 유혹에 저항하도록 요구하고 있습니다.
제 8 계명
“도둑질하지 못한다.”(출애굽기 20:15)
전능하신 하느님께서는 우리 각자에게 일할 수 있는 능력, 삶의 수단들을 생산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영적으로나 물적으로나 사람의 소유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 자신이나 사회의 유익을 위한 관리인이 될 수 있게 합니다. 이웃의 재산을 훔치는 것은 금지되고, 죄로 간주됩니다.
이 계명은 또한 소위 합법을 가장하여 법적으로 이웃의 재산을 강탈하는 행위도 금지합니다. 훔치는 것은 사기이며, 법적 보호와 관계없이 그것은 사람의 양심을 타락시킬 뿐만 아니라 사회와 개인과 국가의 평화를 해치는 악행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세는 법적인 영악함에 대립하여 견고한 도덕적 가치를 세우는 것입니다.
도둑질은 나쁜 습관입니다. 그래서 타인의 소유에 대한 존중과 예의의 태도를 만들기 위해서는 삶의 초기부터 그런 습관을 바로잡아야만 합니다. 이런 태도는 많은 경우 잘못 해석되고 있는 국가의 외적 법률에 의해 유도되기 보다는 오히려 내적인 표준이 되어야 합니다.
제 9 계명
“이웃에게 불리한 거짓 증언을 못한다.”(출애굽기 20:16)
삶의 일반적인 표준에 따르면, 타인의 명예를 해칠 목적으로 공식적인 법정에서나 혹은 공적인 영역에서 거짓 증언으로 타인을 비난하는 것은, 하느님 앞에서 뿐만 아니라 사람 앞에서 죄입니다. 이러한 행위는 단순한 거짓말이 아닙니다. 이것은 결백한 사람을 희생시켜 얻고자 하는 악의적인 쾌락입니다. 이웃에 대해 거짓 증언을 퍼뜨리는 것은 조소, 악담, 불경, 거짓말과 중상을 포함하는 악덕입니다.
이것은 몇 배의 파괴력을 가진 무기를 장착한 공격입니다. 야고보의 편지 저자는 1장 3~5절에서 이웃과 사회에 반한 인간 능력의 사용을 생생하게 그리고 있습니다. 이러한 행동은 전능하신 하느님에 의해 양육되고 유지되는 그리스도의 교회의 진리에 반대하여 서는 것입니다. 계명은 우리에게 거짓 증언은 물론이고 중립적 자세조차도 피하라고 권면할 뿐만 아니라, 우리 구세주께서 산상 설교를 통해 묘사하신 진리의 열매를 추구하라고 우리를 격려합니다.
제 10 계명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못한다.”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못한다. 네 이웃의 아내나 남종이나 여종이나 소나 나귀 할 것 없이 네 이웃의 소유는 무엇이든지 탐내지 못한다.”(출애굽기 20:17)
악한 욕망은 절제되지도 않고 통제되지 않으며 결핍된 성격의 산물입니다. 이웃의 집을 탐하는 것은 그 자체로 불법적인 욕망으로서, 아담의 타락 이후의 사람의 마음에 그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잘 보호하고 감싸주지 않는다면, 사람의 마음은 사회에 반하는 악한 영의 먹이 혹은 사악한 행위의 도구가 될 것입니다.
“유혹을 당할 때에 아무도 ‘하느님께서 나를 유혹하신다.’는 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악의 유혹을 받으실 분도 아니시지만 악을 행하도록 사람을 유혹하실 분도 아니십니다. 사실은 사람이 자기 욕심에 끌려서 유혹을 당하고 함정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고 죄가 자라면 죽음을 가져옵니다.”(야고보 1:13~15)
복음의 목초지에서 양육된 사람은 이웃에 대해 참된 증언을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영원토록 승리하는 탁월한 진리인 그리스도의 복음의 참된 통로가 되어야 합니다.
십계명, 그리스도께로 이끄는 후견인
십계명의 내용은 금지된 것은 하지 말라고 가르치는 부정적인 방식으로 주어졌습니다. 이것은 악에 반대하는, 뛰어난 가르침이자 지침입니다. 십계명은 “그리스도께로 우리를 이끄는 후견인”(갈라디안 3:24)으로 간주됩니다. 십계명의 계단에 오를 때,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전능하신 하느님과 이웃을 향한 그리스도교적 이상과 목표의 새로운 계단을 오르도록 요구받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모든 것을 요약 강조하여 “나는 율법을 없애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마태오 5:1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십계명은 하느님의 은총에 의해 우리 신앙의 주인이시고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위격을 통하여 충만하게 실현된 율법입니다. 새로운 창조의 계단에 오르려는 신자들의 어떠한 노력도, 그리스도에 대한 확고한 신념과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시작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야말로 우리 생각과 존재의 완성을 향한 모든 갈망을 보호해주시는 분이십니다. 신자들은 “좋은 땅”을 더럽히지 않도록 잘 지켜야 하고, “우리가 숨 쉬고 움직이며 살아가는 그분”(사도행전 17:28)에 대한 믿음, 이 거룩한 씨를 의심 없이 받아들여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