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로마–콘스탄티노플의 대주교이자 세계 총대주교 바르톨로메오스는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신
구세주 그리스도의 은총과 자비와 평화가 온 교회에 임하길 기원합니다.
존경하는 형제 주교님들과 주님 안에서 축복받은 자녀 여러분,
하늘로부터 오는 은총으로, 올해도 다시금 하느님의 말씀이 육신으로 오신 성탄 대축일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분은 “형언할 수 없는 인간 사랑으로”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와 함께 거하셨습니다. 우리는 시편과 성가, 그리고 말로 다할 수 없는 기쁨으로 성육신의 위대한 신비를 기립니다. 이 신비는 “모든 새로움 중 가장 새롭고, 태양 아래 유일하게 새로운 것”[1]으로, 이를 통해 우리에게 은총에 의한 신화의 길이 열리고, 온 피조물이 새롭게 됩니다. 성탄절은 “빠르게 찾아왔다가 더 빠르게 사라지는” 감정을 경험하는 때가 아닙니다. 성탄절은 하느님 섭리의 전체 사건에 존재론적으로 참여하는 때입니다. 마태오 복음사가가 증언하듯(마태오 1,18–2,1-23), 세상의 지도자들은 처음부터 이 신성한 아기를 없애려 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성부 하느님의 아들이자 말씀이 성육신하신 축일에 “그리스도께서 나셨다”는 외침과 함께, 그분의 고난을 알리는 애통한 종소리도 듣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는 외침, 즉 죽음에 대한 승리와 모두의 부활에 대한 기대라는 기쁜 소식도 항상 듣습니다.
폭력, 사회적 불의, 인간 존엄성의 파괴가 가득한 세상에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평화”라는 찬양이 다시 한 번 들려옵니다. 과학과 기술의 놀라운 발전은 인간 영혼의 깊이에 다다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항상 과학이 이해할 수 있는 것보다, 기술의 발전이 추구하는 것보다 더 위대하기 때문입니다. 인간 내면에 자리하는, 천상과 지상 사이의 간격은 학문적인 접근 방식으로는 메울 수 없습니다.
오늘날 ‘메타휴먼’에 대한 많은 논의와 인공지능에 대한 찬양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물론 ‘초인’에 대한 꿈은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메타휴먼’의 개념은 기술적 진보와 전례 없는 장비를 기반으로 하며, 이를 통해 지금까지 있었던 인간의 한계를 초월할 수 있을 것이라 주장합니다. 교회는 기술에 대한 공포증(테크노포비아)을 지니고 있지 않습니다. 교회는 과학적 지식을 “하느님께서 인류에게 주신 선물”로 받아들이지만, 과학주의의 위험을 간과하거나 숨기지 않습니다. 2016년 크레타에서 열린 정교회 성 대 공의회의 공식 문서에서는 그리스도교가 “세속 문명의 건강한 발전에 기여한 바”를 강조하며, 이는 하느님께서 “사람을 하느님의 피조세계의 관리자요, 세상에서 하느님의 사역을 돕는 동역자로 세우셨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 문서에서는 다음과 같이 강조합니다. “정교회는 현대 세계의 ‘신이 된 사람’(사람-신)에 반하여 ‘인간이 되신 하느님’(하느님-인간)을 모든 것의 궁극적 척도로 삼습니다. ‘우리는 신화된 사람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되신 하느님에 대해 이야기합니다’(다마스쿠스의 성 요한, 『정교 신앙에 대하여』 III, 2, PG 94,988).”[2]
이 중요한 문제에 대한 답은, 즉 “기술 문화의 거대주의와 프로메테우스적 성향, 그 진화와 변형, 인간의 신격화적 변화와 초인적 과장 속에서도 ‘인격의 문화’를, 그 신성함을 존중하고 그 아름다움을 강조하는 문화를, 마지막 ‘여덟 번째 날’까지 지킬 수 있을까?”하는 문제에 대한 답은, 이미 신성한 성육화의 신비를 통해 한 번에 주어졌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셨고, “진리가 오셨”고 “그림자는 지나갔”습니다. 인간이 언제나 진리 안에 있으려면 하느님과 관계를 맺고 있어야 합니다. 인간이 하느님을 만난 것은 하느님께서 이 땅에 내려오심으로써 가능해졌고, 또 인간은 종말의 날에 하느님께서 영광의 왕으로 다시 오시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살아있는 믿음은 인간이 지상 삶의 모순과 도전에 응답하는 싸움을 지지하며,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다”(마태오 4,4)고 말씀하신 대로 생존과 사회적, 문화적 발전을 위한 싸움을 지지합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삶에서 하느님과의 관계없이, 하느님 왕국에서 오는 “삶의 충만함, 기쁨의 충만함, 지식의 충만함”[3]의 지평 없이 번영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성탄절은 우리가 신성한 자유의 신비와 인간 자유의 위대한 기적을 인식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시지만, 그러한 자유로 존중받은 인간만이 그 문을 열 수 있습니다. 고(故) 조지 플로롭스키 신부님이 쓴 것처럼, “분명히, 그분 없이, 그리스도 없이는 인간은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고 그리스도를 맞아들이는 것입니다.”[4]
우리가 하느님의 부르심에 “예”라고 응답할 때, 그리스도께서는 “참된 빛”(요한 1,9)으로, “길이요 진리요 생명”(요한 14,6)으로 나타나십니다. 또 종말에 관한 우리의 의문에 답변이 되시고, 우리 마음이 열망하는 것, 희망하는 것, 창조의 기원과 목적에 대한 답변을 주십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 속해 있으며,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이 하나로 연합됩니다. 그리스도는 “알파와 오메가, 곧 처음과 마지막이며, 시작과 끝”(요한계시록 22,13)이십니다. 그분의 자발적인 성육신 안에서, 즉 “우리를 위한, 우리의 구원을 위한” 성육신 안에서, 하느님의 말씀은 “단순히 한 인간 안에 거하시지 않고, 당신의 위격으로 인간 본성을 전체적으로 받아들이셨습니다.”[5] 이를 통해 인류가 다함께 거하게 될 영원한 나라를 만드시고, 인류를 하나로 연합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한 민족만을 해방시키시는 것이 아니라, 인류 전체를 구원하십니다. 또 역사를 단순히 구원적으로 나누시는 것에 그치지 않고, 피조세계 전체를 새롭게 하십니다. 역사가 그러하듯, 우주 역시 ‘그리스도 이전’과 ‘그리스도 이후’라는 구분이 궁극적이고 결정적으로 적용됩니다. 세상 속에서, 역사 속에서, 그리고 종말로 가는 여정 속에서, 곧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하늘나라의 영원한 날로 가는 여정 속에서, “세상에 속해 있지 않은” 교회는 진리를 증언하며, “세상의 생명을 위해” 거룩하고 영적인 자신의 사명을 수행합니다.
형제들과 자녀 여러분,
우리는 경건한 마음으로, 아기 예수를 품에 안고 계신 하느님의 어머니 앞에 무릎 꿇고, 우리 인간의 모습을 취하신 “태초의 말씀”께 겸손히 경배 드립니다. 여러분 모두 축복되고 거룩한 축일 기간(성탄절부터 신현 축일까지의 12일)을 보내시길, 또 주님의 은총이 가득한 새해를 맞이하시길 기원합니다. 이 새해가 영적 기쁨과 거룩한 은혜로 가득하고, 선행으로 풍성하며, 건강하고 평화롭기를 바랍니다. 또한, 새해에 맞는 제1차 니케아 공의회의 1700주년을 모든 그리스도교 세계가 함께 기념하며 경축하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2024년 성탄절에
여러분 모두를 위해 하느님께 열렬히 간청하는
+ 바르톨로메오스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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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다마스쿠스의 성 요한, 『정교 신앙에 대하여』, PG 94,984
[2] 공의회 회칙 10
[3] 알렉산더 슈메만, 나는 믿는다, 아테네, 1991, 129쪽
[4] 조지 플로롭스키, 창조와 구속(救贖), 테살로니키, 1983
[5] 성 니콜라스 카바실라스, 미발표된 설교 아홉 편, 테살로니키, 1976, 10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