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성탄절의 장엄한 시기송에서, 우리 교회의 위대한 성가 작가인 6세기의 로마노스 성인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태초로부터 계신 하느님이 우리를 위해 아이로 태어나셨음이니라.”
육화의 신비, 곧 시간 밖에 계신 영원한 하느님께서 시간 속으로 들어오셔서 아기가 되셨다는 이 역설적인 진리는 성탄절의 수많은 성가와 교부들의 글 안에서 거듭 강조되며 울려 퍼집니다.
탁월한 신학자이자 시인인 나지안조스의 성 그레고리오스—교회가 성 요한 복음사가 다음으로 ‘신학자’라는 칭호를 붙여 준 성인—는 그리스도의 탄생에 대한 한 훌륭한 설교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육체가 없으신 분이 인간의 육체를 취하신다. 하느님의 말씀이 물질로 된 몸을 두르신다. 보이지 않던 분이 보이게 되시고, 손에 닿지 않던 분이 손에 잡히게 되신다. 시간을 초월해 계시던 분이 기꺼이 시간의 시작을 받아들이신다. 하느님의 아들이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사람의 아들이 되신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변하지 않으시는 분이다.’(히브리 13:8)”
참으로 우리의 이성은 하느님의 아들이 육신을 취하신 이 헤아릴 수 없는 신비 앞에서 어지러움을 느낍니다. 인간의 말은 침묵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크나큰 신비 앞에서 인간은 말이 아니라 침묵으로 경외심을 드러냅니다. 그래서 7세기의 위대한 신학자이자 성가 작가인 다마스쿠스의 성 요한은 성탄 카타바시아 제 9오디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부적절한 말을 할까 두려워 차라리 침묵을 선택하는 것이 더 쉽고 안전하노라.”
형제자매 여러분, 하느님의 극진한 겸손을 함께 묵상해 봅시다. 모든 거룩함의 근원이신 분께서 울고 배고프며 도움과 어머니의 품을 필요로 하는 아기가 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신성을 잃으셔서 포대기에 싸이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의 죄악 한가운데에 당신의 거룩함을 심어 주시어, 우리가 그 거룩함을 유산으로 물려받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께서 “하늘을 밀어 제치시고 내려오신”(시편 18:9) 이유는 무엇일까요? 단지 우리를 ‘조금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드시기 위해서일까요?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천상의 시민’으로 만드시기 위해, 다시 말해 거룩하신 당신처럼 우리 또한 거룩하게(레위기 20:7, 26; 1베드로 1:16) 하시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외적인 규칙이나 도덕적 명령을 통해서가 아니라, 당신께서 우리 안에 머무심으로써 이루어집니다. 하느님의 거룩하심은 멀리 있는 이상도, 도달할 수 없는 도덕적 완전성도 아닙니다. 거룩함이란 곧 그분께서 우리 안에 현존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하느님으로 타오르고, 우리 안에 그분 외에는 아무것도 자리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신 밤, 천사들은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기쁨”이라고 노래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장엄하고 아름다운 천상의 성가를 불렀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평화, 사람들에게는 사랑이요!”(루가 2:14 참조) 평화와 사랑, 곧 하느님께서 인간 안에 머무시기를 좋아하셨다는 뜻입니다.
동정녀 마리아의 잉태 소식을 듣고 약혼을 파기하려던 요셉에게 주님의 천사는 이렇게 말하며 그를 안심시켰습니다.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임마누엘은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다.”(마태오 1:23, 이사야 7:14 참조) 이것이 바로 거룩함입니다. 하느님이 우리 안에 계시고, 우리가 하느님 안에 있는 것 말입니다.
우리의 세례성사 때 교회는 사도 바울로의 말, “세례를 받아서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간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를 옷 입듯이 입었습니다.”(갈라디아 3:27)를 통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태어났음을 확언합니다. 그리고 이제 거룩함을 마치 우리의 두 번째 피부처럼 입고 살아가도록 우리를 초대합니다. 그리스도의 신성이 우리의 호흡이 되고, 생각이 되고, 소망이 되고, 존재 자체가 되도록 하라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성육신은 2천여 년 전에 일어난 하나의 역사적 사건에 머물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육신은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되는 신비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태어나시도록 허락하는 매 순간, 베들레헴은 다시 이루어집니다. 우리 마음의 ‘구유’는 비록 죄라는 ‘짚’으로 가득 차 있을지라도, 바로 그곳이 그리스도께서 기꺼이 태어나기를 원하시는 구유가 됩니다. 우리의 혼란 속에서, 우리의 가난함 속에서, 그리고 그분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우리의 무능함 한가운데에서 말입니다.
우리 모두는 내일이 아니라 오늘, 바로 지금, 거룩함의 길을 시작해야 합니다. 거룩함은 피곤함 속에서, 불완전함 속에서, 우리의 일상적 실패 속에서, 가정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 죄 많은 사회 속에서 태어납니다. 거룩함은 완벽한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끊임없이 하느님을 갈망하고 목말라하는 사람들을 위한 것입니다.
성 대 바실리오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거룩함은 여러 덕목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모든 덕의 총합이며 우리 안에 계신 하느님의 현존 그 자체이다.” 성탄절은 이 거룩함이 우리가 스스로 성취한 결과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거저 주신 선물임을 일깨워 줍니다. 그 선물은 연약한 갓난아기의 겸손 안에 숨겨져, 포대기에 싸인 채 우리에게 건네진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이제 우리 각자는 스스로에게 이렇게 자문해봅시다. “올해 나의 마음이라는 구유는 갓난아기가 가져다주시는 거룩함이라는 위대한 선물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가? 내 마음이 참으로 가난하고 맑아져서 거룩하신 하느님께서 마침내 머무실 자리를 찾으실 수 있도록, 불필요한 모든 물질적 집착을 비워 낼 준비와 결심이 되어 있는가?”
이번 성탄절에 우리 모두가 거룩함에 대한 갈망을 깊이 체험하며 감동받기를 소망합시다. 세상이 선물과 불빛, 음식과 같은 덧없는 물질적 쾌락을 향해 분주히 달려갈 때, 우리는 조용히 구유 앞에 서서 그분의 심장이 우리의 심장 안에서 뛰는 소리를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베들레헴의 그 절대적인 고요 속에서 거룩함을 경험합시다. 그것은 우리가 무엇인가를 스스로 성취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분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1요한 4:19)입니다.
성탄절은 더럽혀진 이 세상 한가운데로 거룩함이 힘있게 스며드는 축일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거룩한 삶으로 그분을 찬양합시다. 그분의 계명을 따르며 거룩함을 향해 끊임없이 나아갑시다. “하느님의 뜻은 우리가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2데살로니카 4:3)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든 성직자들과 주님의 협력자들을 대표하여, 여러분 모두 건강과 영적 기쁨 속에서 위대한 성탄 축일을 보내시기를 기원합니다.
이 땅에 태어나신 그리스도 안에서 한없는 사랑과 존경의 마음으로,
✝암브로시오스 조성암 한국의 대주교이자 일본의 엑사르호스
